벼랑에 선 ‘빨치산 금수저’ 최룡해 부활할까
  • 이영종│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5.11.16 17:54
  • 호수 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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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을설 장의위원회 명단서 빠져…‘처형설’ ‘혁명 교육 중’ 등 소문 난무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원장을 전격 처형한 2013년 12월. 북한 관영 선전매체들은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당시 직책) 띄우기에 나섰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체제에서 ‘좌(左)성택, 우(右)룡해’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두 사람의 운명이 극명하게 교차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로동신문은 최룡해의 아버지인 최현(1982년 사망)을 거론하며 “수령님(김일성 주석을 지칭)의 그림자도 밟지 않은 충신 중의 충신”이라고 치켜세웠다. 장성택 숙청으로 어수선한 체제 내부를 추스르고 주민들을 결속하기 위한 방패로 최룡해 가문 띄우기가 이뤄진 것이다. 김일성 일가를 지칭하는 이른바 ‘만경대 가문’이나 ‘백두혈통’을 빼고 북한에서 어떤 집안이 찬양의 대상으로 떠오른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란 점에서 대북관측통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로부터 2년 가까이 흐른 지난 11월8일 최룡해의 신상에 이상 징후가 감지됐다. 북한이 하루 전 사망한 군부 원수(元帥)인 리을설의 장의위원회 명단을 발표하면서 최룡해를 빼버렸기 때문이다. 김정은을 위원장으로 한 장의위원 170명에는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비롯한 김정은 체제의 노동당·군부 권력 실세들이 망라됐다. 최룡해가 처형됐다는 주장이 일부 전문가들로부터 나왔고, 근신 중이라는 얘기에서부터 실수로 명단에서 제외됐을 것이란 관측까지 온갖 설이 난무했다. 지난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행사에 참석했던 류윈산(劉雲山)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잘 접대하지 못해 김정은의 눈 밖에 난 것이란 구체적인 말까지 나돌았다. 생전에 리을설의 심기를 건드려 문상에 초대받지 못한 것이란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신빙성이 있는 건 없는 듯 보였다.

정보 당국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대북 정보 당국의 핵심 관계자는 “뭔가 이상이 있는 건 맞는데 사실 제대로 파악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유는 최룡해의 신상에 탈이 난 것 같다는 걸 알게 된 게 북한 매체들의 장의위 명단 발표 때문이란 점에 있었다. 북한은 고위 인사들의 신상에 이상이 있을 경우에도 이를 공식 발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김정은 수행 횟수가 급격하게 감소했거나 공개 석상에서 사라졌다고 판단된 직후 대북 정보망을 가동한다는 얘기다. 장성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최룡해의 경우 불과 며칠 전까지 이상 없이 공식 활동을 했다. 10월31일자 로동신문에 “내년 5월 노동당 제7차 대회는 역사적 대회합”이라고 강조하는 기고까지 한 상태였다. 뭔가 급작스러운 문제가 생긴 것이란 판단이 가능한 대목이다.

최룡해의 거취를 쫓던 언론에 ‘혁명화 교육 중’이란 윤곽이 잡힌 건 장의위 명단 발표 후 나흘 만인 11월12일이다. 통일부 출입기자들이 ‘대북 소식통’을 인용해 일제히 “최룡해가 지방의 협동농장에서 혁명화 교육을 받고 있다”고 보도한 것이다. ‘혁명화’란 북한에서 태공(怠工, 일을 나태하게 처리함)을 부리거나 중대한 과오를 범한 간부를 평양과 떨어진 지방의 협동농장이나 공장·업소에 농장원이나 노동자로 보내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태어나도록 단련하는 과정을 말한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현재 최룡해의 ‘혁명화’가 벌어지게 된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대북 첩보망을 총가동 중”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김정은이 핵심 측근을 내치게 된 배경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봐야 현재 평양 권력의 내부에서 어떤 파워게임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최룡해가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도 향후 사태를 전망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첩보위성이나 정찰기 등 한·미연합의 정보자산을 총 가동해 권력 핵심층들의 통화 내용 등을 감청하고, 북한 권력 내부의 인적 정보망인 휴민트(humint)를 가동해 분위기를 포착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최룡해는 다른 당과 군부의 간부와 달리 북한 권력에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의 아버지 최현은 김일성과 함께 이른바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한 것으로 북한 당국은 선전하고 있다. 당시 사진 자료를 보면 최현은 김일성보다 나이도 많고 계급도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현은 김일성에게 깍듯한 충성심을 보여 인민무력부장 등 요직을 거쳤고, 아직도 ‘충직한 혁명투사’로 찬양받고 있다. 그런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최룡해는 한마디로 ‘빨치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할수 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11월8일 리을설 인민군 원수의 빈소인 평양 중앙노동자회관을 찾아 조문했다. © 조선중앙통신연합

“최룡해, 혁명화 교육 받고 있다”

최룡해는 북한 정권의 최고 핵심 인물의 자손을 교육하는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김정일의 대학 학과 후배(김일성대 정치경제학부)로 인연을 맺었다. 30세이던 1980년에 청년 조직인 사로청(현 청년동맹)의 해외교양국장을 맡았고, 6년 만에 사로청 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거머쥐었다. 이듬해엔 김일성 훈장을 받았고 1989년에는 김일성이 88서울올림픽에 대응해 개최한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그야말로 거침없는 승승장구였다.

최룡해에게 시련이 닥친 건 김정일 체제가 공식 출범한 1998년 그가 청년동맹 최고 책임자(제1비서)에서 해임되면서다. 그는 평양시 상하수도관리소 당 비서로 좌천됐다. 암울한 시기를 보낸 최룡해는 5년 만인 2003년 노동당 총무부 부부장으로 중앙당에 복귀했고, 2006년에는 황해북도 당 책임비서로 임명됐다. 그러던 그가 화려하게 부활한 건 김정은의 후계 체제를 결정한 2010년 9월 당 3차 대표자회에서다. 이를 계기로 최룡해는 북한군 대장에 임명됐고, 당 중앙위 비서와 정치국 후보위원에 임명됐다.

김정은 체제 등장 초기 최룡해는 후계 권력을 다지는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장성택 처형 이후에는 김정은의 수행 횟수 1위를 기록하는 등 최고 실세로 자리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빨간불이 켜졌다. 황병서에게 밀려 총정치국장 자리를 내줬고, 당 비서로 밀려난 것이다. 올 3월에는 북한 로동신문이 그를 ‘노동당 정치국 위원 겸 당 비서’라고 호칭함으로써 정치국 상무위원에서도 해임됐음을 알렸다. 하지만 최룡해는 이후에도 김정은의 옆자리를 지켰고, 권력 실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그러던 중 지방 협동농장행이라는 날벼락을 맞았고, 자칫 모든 걸 잃고 몰락할 수 있는 벼랑에 섰다. 일각에서는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당 부부장이 최룡해의 둘째 며느리이기 때문에 숙청 단계는 아니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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