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을 희생양으로 만들지 마라”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5.11.26 21:02
  • 호수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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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파리 테러 이후에도 난민 구호 정책 고수

“파리 테러는 자유에 대한 공격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삶이 어떤 테러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가치를 어느 때보다 더 자부심을 갖고 실천하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파리 테러가 발생한 다음 날인 11월15일 아침 긴급 담화를 통해 파리 테러에 대한 독일 공공 담론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이슬람국가(IS)의 파리 공격을 ‘우리 문제로 인식하되 움츠러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에서 129명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겪고도 일상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11월17일 저녁에 예정됐던 독일과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친선 경기가 그 단적인 예다. 독일축구연맹은 테러의 위협에도 끄떡없는 유럽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경기 개최를 강행했다. 메르켈 총리와 지그마르 가브리엘 부총리, 토마스 드 메지에르 내무장관 등 독일 연방정부의 고위 정치인들도 직접 하노버 경기장을 찾을 예정이었다. 이날 경기는 유럽 축구 챔피언십을 1년여 앞두고 국가대표팀 후보군의 기량을 점검한다는 당초의 계획보다 정치적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더 큰 행사였다.

11월18일 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 당원 등이 메르켈 총리를 무슬림 여성으로 희화한 사진을 들고 파리 연쇄 테러 희생자 추모집회를 열고 있다. ⓒ AP 연합

하지만 국가대표팀 경기는 시작을 한 시간 반가량 앞두고 갑자기 취소됐다. 누군가가 경기장에서 폭탄을 터뜨리려 한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경기장과 시내 곳곳에 있던 3만5000명의 축구팬들은 “당황하지 말고 신속하게 귀가하라”는 경찰의 안내에 따라 평소보다 큰 보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노버 중앙역에서는 누군가가 정교하게 만든 모형 폭발물을 열차에 두고 사라져 역이 폐쇄되는 소동이 빚어졌다. 인기 가수의 콘서트와 풍자 코미디언의 낭독회도 잇따라 취소됐다. 도시 전체에 테러 경보가 발령되면서 하노버 시민들은 “테러는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메르켈의 말을 실감했다.

테러 위협에 축구 경기 취소

한편 독일의 극우파는 파리 테러를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 모든 외국인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낙인찍음으로써 외국인 혐오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극우 단체인 프로 엔에르베(Pro NRW)는 11월22일 쾰른 시내에서 반(反)이슬람 집회를 열겠다고 예고했다. 반이슬람주의를 내건 단체인 페기다(PEGIDA, 독일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는 “수천 명의 IS 지하디스트가 난민으로 둔갑해 들어왔다”거나 “난민이 독일 여성을 강간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시민들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독일 극우파는 반테러 운동과 추모 분위기를 악용하고 있다. 뉴스 사이트 ‘차이트 온라인’은 한 백인 남성이 경기장을 떠나면서 휴대폰에 대고 큰 목소리로 “참을 만큼 참았다. 내일 독일 대안당(AFD, 독일 극우정당)에 가입할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보도했다. 이 남자는 주변에서 아무도 동조하지 않자 “여기는 독일인데 나와 경찰 외에는 백인이 아무도 없다”고 고함을 지르며 노골적으로 인종 혐오를 표출했다.

이처럼 파리 테러를 구실로 이슬람과 난민 혐오를 부추기는 극우파의 책략에 독일 정치권은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국방장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난민들은 우리가 파리에서 겪은 것과 똑같은 야만적 행위로부터 탈출했다”며 “난민을 희생양으로 삼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우파의 공세를 감지한 독일의 무슬림 사회 역시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해 분명히 선을 긋고 나섰다. 아이만 마츠예크 독일 무슬림중앙회 대표는 성명서를 내고 “여러 사회 집단과 종교들 간의 혼란·증오, 불화의 씨를 뿌리려는 테러리스트의 의도를 막으려면 함께 행동해야만 한다”며 화합을 강조했다. 독일 터키중앙회의 괴카이 소푸오글루 대표는 “우리 무슬림들은 이제 단호하게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테러행위를 규탄해야 한다”며 무슬림 공동체의 행동을 촉구했다.

이에 부응해 인터넷상에서는 게시물에 ‘Not In My Name(내 이름으로는 안 돼)’이라는 해시태그를 다는 캠페인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무슬림 네티즌이 온라인 공간에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고 “나와 나의 신앙을 걸고 테러를 정당화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운동이다. 2014년 처음 시작된 이후 한동안  잊혔다가 파리 테러 직후 다시 급격히 확산되는 중이다.

그러나 이 같은 분위기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들린다. 무슬림에게 평화주의 선언을 강요하는 것은 무슬림의 폭력성을 전제로 한 사상 검증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다. 블로거 하티스 인스는 “나는 파리 테러로부터 분명히 거리를 두라는 요구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테러에 찬성해서가 아니다. 내가 테러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 독일에서는 여러 차례 망명자 숙소에 불이 났지만 나는 독일인 친구들에게 극우주의를 멀리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당연히 그럴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라고 불편한 심경을 전했다.

평화 캠페인으로 맞서는 무슬림

파리 테러가 발생하기 직전까지 메르켈의 난민정책은 거센 비난을 받았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하는 바람에 큰 혼란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숙소 부족으로 일부 난민들은 체육관과 천막, 컨테이너 박스에 마련된 임시 숙소에서 지내야 했다. 난민 관련 업무가 포화 상태에 도달하면서 망명 심사대의 줄은 끝없이 길어졌다.

게다가 유럽 국가별 난민 쿼터제 도입을 위한 협의가 난항을 거듭하면서 여당인 기독민주연합(CDU)의 지지층에서도 왜 굳이 독일이 난민 구호에 앞장서야 하느냐는 불만이 불거져 나왔다. 결국 11월 초 드 메지에르 내무장관과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이 사전조율 없이 “독일도 난민 수를 제한하고 국경 검문을 강화해야 한다”고 메르켈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테러 발생 직후 메르켈은 난민정책을 그대로 고수하겠다고 밝혔다. 드 메지에르 장관 역시 메르켈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지금 시점에 난민정책을 수정하면 난민 탓에 테러가 발생했다는 오해를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파리 테러의 여파는 독일의 일상과 정치에서 분명히 감지되고 있다. 여진은 시민들의 불안이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뉴스 사이트 ‘슈피겔 온라인’의 바바라 한스 편집장 대리는 “테러는 불안으로 더 이상 아무 의심 없이 일상을 영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며 “테러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이어나가는 것은 상징적 의미는 있지만 신뢰감을 주지는 않는다”고 진단했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대화다. 일상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깨어진 믿음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온한 일상은 부담감 없이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을 때야 비로소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독일 사회는 아직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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