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시위’ 프레임에 갇힌 민중총궐기대회
  • 송응철 기자 (sec@sisapress.com)
  • 승인 2015.12.10 17:10
  • 호수 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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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개 참여 시민단체 ‘요구 사항’ 살펴보니…국민 공감 이슈 많은데 ‘폭력’ 논란에 파묻혀

지난 11월14일 광화문광장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민주노총 주도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 현장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시위대가 경찰이 설정한 질서 유지선을 넘으려 하면서부터 몸싸움이 시작됐다. 경찰이 이를 저지하자 일부 시위 참가자는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차벽으로 이용된 경찰 버스를 때려부쉈고, 미리 준비한 밧줄을 바퀴와 창틀에 묶어 모두 4대의 차량을 파손했다. 또 버스 주유구에 불을 붙이려는 위험천만한 시도도 있었다. 일부 시위자는 보행자 도로의 보도블록을 빼 경찰 버스와 경찰관들을 향해 던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 언론사 기자가 얼굴에 돌을 맞아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시위 막바지에는 횃불도 등장했다. 횃불을 든 50여 명의 참가자가 경찰 차벽 앞에 줄지어 서면서 긴장감이 조성됐다.

11월14일 서울 광화문사거리에서 민주노총 등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개최한 정부 규탄 ‘민중총궐기 투쟁대회’가 열렸다. 경찰이 집회 참가자들에게 캡사이신 물대포를 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경찰도 강경하게 대응했다. 경찰 버스에 밧줄을 매 끌어당기는 시위대를 향해 캡사이신이 섞인 물대포를 살포했다. 캡사이신은 최루탄에 대한 인권침해 논란이 거세지자 경찰이 새롭게 내놓은 시위 진압 수단이다. 최루탄에 비해 안전성이 높고 농도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기본적으로 피부에 닿으면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 화학물질이다. 진압 과정에서 부상자도 발생했다. 전남 보성농민회 소속 한 참가자는 경찰이 근거리에서 직사한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아직까지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일련의 사태로 민중총궐기대회는 ‘폭력 시위’라는 프레임에 갇혔고, 그 위로 경찰의 ‘과잉 진압’ 논란이 덧씌워졌다. 세상의 관심은 온통 그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에 맞춰졌다.

민주노총은 이번 집회에 참가한 인원이 15만여 명이라고 추산했다. 경찰은 8만여 명으로 파악했다. 2008년 광우병 파동으로 촉발된 촛불시위 이후 최대 규모다. 이처럼 대규모 인원이 참가했는데도 정작 집회의 목적은 잘 전달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요 언론에서 시위의 폭력성만 강조한 보도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집회에 어떤 단체들이 참가했고, 이들이 정부와 국민에게 전달하려고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촛불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집회

먼저 집회를 주최한 건 ‘민중총궐기투쟁본부(이하 투쟁본부)’다. 민주노총을 구심점으로 노동·농민·교육·보건의료·청년학생·통일·여성·성소수자·종교·장애인·빈민 등 각계각층의 사회단체 53곳이 모였다. 민주노총은 매년 전태일 열사의 기일인 11월13일을 전후로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해왔다. 올해는 여기에 다양한 분야의 시민단체들이 참가해 ‘판’이 커진 것이다.

투쟁본부는 집회의 주제를 큰 틀에서 ‘농민’ ‘빈민’ ‘청년학생’ ‘시민’ ‘반재벌’ ‘노동’ 등 총 6개 부문으로 나눴다. 또 6개 부문을 11대 영역으로 분류하고, 각 영역마다 2개씩 모두 22개의 요구 사항을 정했다. 부문별 시민단체들은 민중총궐기 당일 각각 사전 집회를 열고 각계 요구를 전달했다.

민주노총이 주도한 노동 부문에서는 ‘쉬운 해고 평생 비정규직, 노동 개악 중단’과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로 최저임금 1만원 실현’을 요구했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는 임금피크제로 전체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고, 일반해고 도입으로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며, 비정규직 사용 기한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해 노예계약을 연장시키려 하고 있다”며 “이는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고, 그렇지 않아도 사측의 불법·탈법이 난무하는 노동 시장을 무법천지로 만들어 노동자를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농민 부문은 전국농민회총연맹·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가톨릭농민회·친환경농업인연합회 등으로 이뤄진 ‘농민의 길’이 주도했다. 이들은 ‘밥쌀 수입 저지’와 ‘쌀 및 농산물 적정 가격 보장’을 촉구했다. 농민의 길은 “정부는 쌀값 폭락의 원인이 된 ‘밥쌀용 쌀 수입’이 불가피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며 “한국은 이미 쌀이 관세화로 개방됐고 기존 의무 수입 물량을 유지하되 이를 어떻게 쓰는지는 협상의 여지가 있음에도 밥쌀용 쌀 수입을 강행해 작년 대비 30%나 쌀값이 폭락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빈민해방실천연대·전국빈민연합·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이 참여한 빈민 분야의 이슈는 ‘노점 단속 중단’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등이었다. 이들은 “노점상은 매일 단속과 강제철거 위협 속에 살고 있으며 장애인은 국민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가난이 두려워 죽음을 택하는 빈곤층의 삶을 정부가 더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폭력 시위 양상 반복에 자성의 목소리 높아

시민 부문에서는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온 ‘역사교과서 국정화 계획 폐기’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등을 다뤘다. 주최 측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해 “대다수 역사학계와 국민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고 있다”며 “그것이 이 땅의 지배 세력들의 친일·독재 전력을 미화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고 주장했다.

주최 측은 또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지난해 294명의 생명을 앗아갔던 세월호의 비극이 올해 메르스 사태로 재연돼 36명의 생명이 또다시 스러졌다. 세월호 참사 당시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던 이 정권은 무책임한 대응과 병원 공개 거부로 또 다른 세월호 참사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며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민중의 안전과 생존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이 정권의 본질이 또다시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청년학생 분야에 소속된 단체들은 “재벌 곳간을 열어 청년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며 ‘헬조선 뒤집는 청년총궐기’ 선포식을 가졌다. 이들은 “대학생들은 지금도 등록금 마련을 위해 거리, 편의점, 공사장, 카페로 힘든 아르바이트에 내몰리고 있다”며 “노동 개혁 역시 청년팔이 노동 개악에 불과하다. 재벌 중심의 기업 구조로 청년들은 지속적으로 저임금 비정규직과 파견노동에 시달린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독선과 독재, 청년과 국민의 삶을 파탄시키는 박근혜 정부에 책임을 묻자”며 “청년을 버린 나라에 스스로 맞서 싸우겠다”고 밝혔다.

반재벌 부문에서는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로 최저임금 1만원 실현’과 ‘상시 지속 업무 정규직 전환-하청노동자 직접 교섭 참여 등 사용자 책임 이행’ 요구가 나왔다. 그 밖에도 주최 측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 국가인권위 독립성 확보, 대북 적대 정책 폐기,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 중단, 국립공원 케이블카 건설 계획 폐기, 신규 원전 건설 저지, 의료·철도·가스·물 민영화 중단, 제주 영리병원 추진 중단, 공공의료 확충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진보 성향의 사회단체들이 제기할 법한 문제들이었고,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슈도 다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슈가 폭력 시위 논란으로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말았다. 문제는 그동안 이런 양상이 계속 반복돼왔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정치권은 물론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도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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