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이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 김원식│국제문제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12.31 18:22
  • 호수 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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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슬람 신자의 총격 테러 사건 이후 ‘증오 범죄’ 빈발

 

2015년 12월2일 오전 11시11분쯤(미국 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LA) 동부 샌버나디노 시의 발달장애인 복지 재활시설에서 이 지역 환경보건과 공무원들이 송년 행사를 개최하던 순간, 갑자기 반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남녀 한 쌍이 이 건물에 들이닥치며 무차별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총격 사건은 14명이 사망하는 참사로 이어졌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범행 직후 경찰에 의해 사살된 범인은 바로 이 지역 환경보건 검사관으로 5년 동안 성실히 근무하면서 같은 날 송년 행사에 함께 참석했던 사이드 파룩(28)과 그의 아내 타시핀 말리크(27)였다는 사실이다. 사건 발생 초기 경찰은 파룩이 송년 행사에서 동료들과 논쟁을 벌인 후 사라졌다가 총기를 가지고 와서 범행을 했다는 목격자들의 말에 단순 분노와 원한 관계에 의한 사건으로 파악했다.

2015년 12월2일 미국 샌버나디노 시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열기가 뜨겁다. ⓒ EPA연합

약혼비자로 미국 입국한 9만명 전수조사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급반전했다. 도주하던 이들 용의자 부부가 경찰에 의해 사살된 승용차 안에서 다른 폭발물과 총기류가 발견된 데 이어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해당 부부의 집을 급습한 결과, 다량의 각종 총기류와 폭발 장치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단순 총격 사건이 아니라 계획된 테러였다는 것이다.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자이자 이슬람 신자인 파룩은 2014년 7월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주로 생활한 말리크와 결혼하기 위해 약혼비자(K-1)를 받아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와 사실상 부부생활을 시작했다. 평소 파룩은 상당히 내성적인 편이고 그 전해에도 부서 송년 행사에 참석했으며, 동료들은 파룩을 위해 임신 축하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총격 사건이 발생한 후에도 동료들은 파룩이 매우 점잖았으며 원한을 갖고 있었던 일도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FBI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말았다. 말리크는 미국으로 들어오기 전에 소셜 미디어에 성전(지하드)을 벌이겠다는 글을 올린 사실이 드러났고, 이들 부부는 더 나아가 이번 발달장애인 복지시설 총격 테러 이후 인근 대학이나 학교 등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또 다른 테러를 벌이기로 모의했다는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테러 계획을 사전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미국 정부는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이 되고 말았다. 국토안보부는 약혼비자를 받아 미국에 입국한 9만명에 달하는 모든 사람을 전수조사하고 있으며 이민 심사의 허점을 보완하는 조치가 이뤄지기 이전에는 약혼비자 발급을 중단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테러 사건의 불똥은 다른 곳으로 튀고 말았다. 이들 부부가 이른바 ‘외로운 늑대’로 불리는 미국 내 자생적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아랍계이자 이슬람을 신봉하는 신자라는 사실에서 엉뚱하게 미국 내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에게, 이른바 ‘증오 범죄’로 불리는 무차별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에게 침을 뱉고 협박하는 사건은 다반사로 일어나며 미국 내 이슬람 사원 앞에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동물인 돼지의 잘린 머리를 던지는 사건이나 방화 시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파리 테러 이후 증가하던 미국 내 무슬림에 대한 증오 범죄는 샌버나디노 사건이 촉매제가 돼 2001년 9·11 테러 이후 2015년이 최악의 반(反)무슬림 증오 범죄의 해로 기록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을 낳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른바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 간의 불신 확산이다. 이번 총기 테러의 주범인 파룩은 미국에서 태어난 파키스탄계 2세로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 알려졌다. 그는 공범인 아내 말리크를 약혼비자로 미국에 데려왔고 생후 6개월 된 딸까지 있는, 겉보기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평범한 이슬람 가정이었다. 이번 테러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동료나 주변의 누구도 이들의 이러한 반미 성향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다 보니 미국인들 사이에서 평범한 무슬림 가정이나 부부라도 이젠 ‘잠재적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불신이 확산하면서 파문이 커지고 있다. 과거 9·11 테러로 인해 미국 내 무슬림들이 겪어야 했던 이른바 ‘이슬람포비아(Islamophobia, 이슬람 혐오증)’가 다시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드러난 증오 범죄야 차라리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그 불똥은 언제 모습을 보일지 모른 채 미국인들 사이에서 이슬람 공포증과 혐오증이 확산하고 있고, 이는 미국 내 무슬림들에게 더욱 말할 수 없는 보복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무슬림 사회에서 자신들을 증오하는 누군가에게서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른다며 ‘어두워지면 혼자 걷지 마라’ ‘지하철을 기다릴 때는 플랫폼 끝에 서 있지 마라’ 등의 증오 범죄 예방 수칙이 빠르게 퍼지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 정치권 판도 바꾼 ‘이슬람포비아’ 재등장

이번 총격 테러 사건은 미국 내 정치 판도도 바꿔버리고 말았다. 처음에 이 사건을 단순히 원한에 의한 일반 사건으로 인식한 민주당의 오바마 행정부는 더 강력한 신분 조사 등 엄격한 총기 관련법이 미국을 더 안전하게 할 것이라며 총기 규제 강화를 주장했다. 민주당 내 유력한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도 “정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제 총기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만 한다”고 총기 규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 사건이 이들 부부의 계획된 테러 사건으로 드러나자, 총기 규제의 목소리는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바마 행정부도 대테러 대책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하고 나서는 형국으로 바뀌고 말았다. 연일 막말을 퍼부으며 공화당 내 대선 후보 선두를 달리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는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아예 모든 무슬림의 미국 입국 금지를 주장하고 나서면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민주당뿐만 아니라 공화당의 지도부와 여타 대선 후보 등 주요 인사들은 트럼프에 대해 분열을 획책하고 차별을 꾀하는 언행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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