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YS가 안 받자 측근으로 ‘검은돈’ 확산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6.03.10 20:06
  • 호수 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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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일 도맡은 홍인길 수석은 월 20억도 부족

“김영삼(YS) 대통령의 자금 관리는 홍인길 총무수석이 전담했다. 집권 전엔 물론이고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는 거의 모든 출납을 관장했다. 특히 1992년 대선을 거치면서 YS는 검은돈의 음습(陰濕)에 진저리를 냈다. YS는 그 검은 고리를 끊으려고 했다. 사명감 넘치는 YS는 자신만이 이 고질을 치유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당선 직후 ‘앞으론 재벌 돈 안 받겠다’는 선언도 그런 의지의 표현이었다. 문제는 정치 현실이었다. 탐욕스러운 현장도 그러려니와 기업인들은 최고 권력자에게, 그게 아니면 그 핵심 측근에게라도 돈을 주어야 안심한다. 아니면 보험을 들지 않은 것처럼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박관용 YS 청와대 초대 비서실장의 말이다.

 

YS의 말 가운데 등장한 ‘앞으론’이란 단어는 ‘과거의 불법’을 시인하는 게 됨에도 당시는 긍정 평가를 받았다. 비록 검은돈이란 딱지를 붙이고는 있으나 필요악이라는 수준에서 일정 부분 ‘양해’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YS로부터 “돈 받지 마라”는 지시를 받은 홍 수석 정도가 ‘어이없어’ 했을 따름이다. 사람 좋고 호방하기로 공인받는 홍 수석이 “(YS) 얘기야 맞지만…자기는 대통령 됐으니까 상관없으나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나. DJ(김대중 야당 총재)는 정치하지 말란 얘기나 다름없지 않은가. 놀부 심보지” 하며 황당함을 표시하기도 했다. 대통령과 6촌으로서, 오랜 세월 보스의 온갖 그늘진 구석을 관리해온 ‘금고지기’ 홍 수석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 홍 수석이었던 만큼 “니 조심해라. 니가 받으면 내가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YS의 엄명을 흘려들을 것은 당연했다. 

 

아니 홍 수석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YS가 말은 저리 하지만 현실을 알고 있으니 괜찮다는 판단과, 대통령을 ‘대신’해 살림을 총괄한다는 인식이 확고했던 홍 수석이었기 때문이다. 사사로이 돈을 챙기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의식도 분명했다. 보통의 청와대 근무자들은 주변 시선과 감청을 우려해 일반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홍 수석은 달랐다. 찾아오는 이를 돌려세우거나 냉대하는 일이 없었다. 민원 해결 등 단서를 붙인 돈은 사양했으나 그렇지 않는 한 마다하지 않았다. 부탁을 받으면 다른 수석이나 비서관, 장차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시원시원하게 일처리를 해주는 홍 수석이었기에 인기 만점이었고, 찾는 이들의 줄이 길어졌다. 지인이 국제행사 예산 부족을 걱정하자 그 자리에서 H그룹 오너에게 전화를 걸어 1억원을 지원토록 해준 통 큰 수석이었다. 박 실장은 홍 수석의 동정은 대략 보고받았으나 나설 계제는 아니었다고 술회한다. 대통령과 특수관계에 있는, 사욕 없는 사람이라는 믿음 외에 청와대 ‘안팎’의 일을 두루 보살폈기 때문이다.

 

1997년 4월 서울구치소에서 열린 국회 한보특위 청문회에 나온 홍인걸 의원. 청와대 총무수석으로서 그는 “재벌 돈 안 받겠다”는 대통령 YS를 ‘대리’해 기업 돈을 받았고 야당 의원 ‘관리’ 등 청와대 안팎을 뒷바라지했다. 그에 대해 비난 못지않게 동정 기류가 강한 것은 호방한 성격과 함께 사욕을 부리지 않은 게 큰 듯하다. ⓒ 연합뉴스

 

큰손 홍 수석, 야당의원들에게도 ‘천만’ ‘억’ 

 

홍 수석은 각 비서실 비용을 대주고, 자리를 못 잡은 예전 야당 동료들과 야당 의원들의 뒷바라지도 도맡았다. “비서실장을 제외한 각 수석실에 월 500만~1000만원을 지원했다. 아는 기업인 없는 재야 출신인 김정남 교문수석은 물론이고 대인 관계가 많은 정무와 공보에는 더 많이 보탰다. 재야 담당 비서관에게는 어려운 재야 인사에게 밥 사고 차비라도 주라며 따로 지원해줬다.” 홍 수석 자신의 회고다. 월 1억원 수준의 대통령의 기밀비 10%가 경조사 화환과 축·조의금도 감당 못할 것은 당연했고 나머지는 홍 수석 몫이었다. 어려운 옛 동료에게 200만~300만원은 예사였고 야당 의원들에겐 1000만 단위의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손 큰’ 홍 수석이었다. 그 자신도 홍 수석의 특별 지원을 받는 이원종 정무수석이 “야당 의원들 간을 너무 키운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였다. 

야당 박지원 대변인에겐 2억원이 전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야당 인사가 박 대변인뿐이 아니었다. 한 기자는 홍 수석이 박 대변인과 강북삼성병원 뒤 한정식집 수정에서 만나는 장면들을 두 차례나 목격했다. 한 번은 음식점 공용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일’을 보며 봉투를 포켓에 넣어줄 때와 다른 한 번은 모 은행장과 셋이 앉아 있을 때다. 이러니 1995년 12월 총선 출마를 위해 청와대를 떠나기 전까지 그의 손을 거쳐간 돈의 크기는 헤아리기 어렵다. 홍 수석은 총액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는데 아무리 최소화시켜도 월 20억은 넘어야 가능한 씀씀이다. 3년 치를 환산하면 700억 가까운 수치다. 이 중 드러난 것은 그가 한보 사태와 관련해 재판을 받을 당시 판결문에 적힌 ‘4회에 걸쳐 8억(한보 정태수 총회장은 10억 주장) 교부’다. 아무튼 이런 엄청난 불법에도 불구하고 홍 수석에 대한 제도 정치권과 재계에서의 평가가 나쁘지만은 않다. 제도권에는 야당도 포함된다. 야당 일각의 그 같은 반응이 공범의식 때문만은 아니다. 필요악으로서 정치자금을 인정하고, 특히 야당의 처지를 이해하며 함께 ‘나눠 썼다’는 측면이 작용했음 직하다. 많이 거둬들였지만 많이 썼고, 개인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는 부분도 고려됐다(재판 결과 분당 아파트와 거제 임야를 압수당한 그의 재산은 부산 서대신동 집이 전부).

 

DJ에 이어 청와대 주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도 정계 데뷔 시절의 고마움을 잔뜩 갖고 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의 야당 측 관계자들도 홍 수석에 대해서는 한 수 접어준다. 1985년 노무현 변호사를 YS에게 소개시켜 총선에 출마케 한 것도 홍 수석이고, 홍 수석은 상대 허삼수 민정 후보를 반드시 꺾어야 한다면서 요즘 가치로 50억 가까운 10억원을 지원했다.

 

그에 대한 비난은 수사선상에 오르자 내뱉은 ‘깃털’인데 이는 와전이다. 권력은 손안에 있을 때 권력이므로 청와대를 떠난 지금은 깃털에 불과하다고 한 게 ‘몸통은 따로 있다’는 식으로 읽혀진 것이다. 그는 2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오도된 ‘깃털론’이 자신을 왜소하고 초라하게 만들었다고 개탄한다.

 

 

‘한 끼’ 몇 차례, 나올 때 주머니 불룩한 이 여럿

 

여하튼 ‘불법’의 크기만으로 치면 결코 용납할 수 없음에도 일정 정도의 이해와 때론 동정까지 받는 홍 수석인데 다소 억지스러운 표현이지만 ‘애교’와 ‘베풂’이 있어서다. 그래서 ‘한보 사태’만 없었다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는 부질없는 가상도 나온다. 또 그랬다면 사실과 관계없이 YS 정권이 검은돈을 떨쳐냈다는 평가도 가능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금고 책임자가 금품 수수 및 알선으로 단죄되고 아들 현철과 여러 상도동 측근들이 기업인들로부터 엄청난 뇌물을 받은 게 드러나 ‘돈을 안 받겠다’는 YS의 호언이 무색해진 것은 물론 위선이란 덧칠까지 감수해야 하게 됐다.

 

장학로 제1부속실장이나 김우석 내무부 장관 등이 뇌물수수로 처벌받았는데 기왕에 알려진 이들 외에도 상당수가 검은돈에 눈이 멀었었다. 수금(收金)을 위해 점심을 두 번, 저녁 약속을 2~3차례 하는 측근들은  여럿이었다. “점심이 끝나고 나올 때면 식당에 들어갈 때와 달리 양복 안쪽 포켓이 불룩해져 나오는 인사들이 흔했다. J씨 등은 과시라도 하듯 100만원짜리 수표 100장이 든 지갑을 마주친 상대에게 일부러 내보이는 치기도 연출했다.” 당시 청와대를 출입하던 기자의 회고담이다.

 

홍 수석은 ‘절 모르고 시주 안 한다’, 즉 주인이 아니면 확실한 2인자라도 만나야 큰돈을 건넨다는 말로 자신이 일정 부분 YS 대역이었음을 시사했는데 ‘2인자’가 못되면서 돈을 챙기는 측근들이 허다했다. 박 실장의 탄식처럼 ‘보험’을 들어야 속 편한 기업인들은 주인(YS)이 마다하자 손닿는 주변 여기저기에 돈을 뿌렸던 것이다. 박 실장은 현철과 실세 C 의원 등이 인사와 이권에 개입했다는 첩보 보고도 실제에 미달한 감이 없지 않다고 술회한다. 이는 검경이나 안기부 등 공안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는 말과 통한다.

 

한보 사태는 홍 수석은 물론 대통령 아들 구속이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를 초래했고 이로 인해 YS는 완전히 기력을 상실했다. DJ의 대통령 당선도 그 반사이익일 수 있다.

 

사실 한보 사태라고 하지만 이 모든 게 YS 정부 출범 이후 빚어진 것은 아니다. 집권 이전 150억원 ‘이상’을 한보 정태수 총회장에게 신세질 때 이미 예고된 불행이었다. 1992년 한국 사회를 들끓게 만든 수서 비리 사건도 정확하게는 ‘한보 수서 비리 사건’이고 YS는 이와도 무관치 않다. 노태우 대통령의 청와대와 발맞춰 26개 연합주택조합에 특혜를 주도록 한 게 민자당이다. 그리고 YS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한보 정 회장은 민자당 재정위원이다. 또 외형상 국회에 청원을 한 주체는 연합주택조합이지만 이 모든 로비 과정을 주도한 것은 정 회장이다. 민자당은 당에 접수된 민원을 처리하는 형식으로, 국회 청원을 수용하는 형태로 특혜를 지원했다. ‘맨입’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여론이 들끓으면서 마지못해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여야 의원 몇 명이 큰돈을 먹은 이유로 처벌됐지만 ‘꼬리 자르기식’ 수사의 결과임은 누구나 대충 짐작했고 몇 년 후 사실로 확인됐다.

 

DJ가 이끈 제1야당도 한보 로비에서 비켜나 있지 않았다. 평민당은 민원을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한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냥 들어주기만 한 게 아니라 서울시장에게 협조 공문까지 띄우는 적극성을 발휘했다. 야당이 왜 이리 호의적이었는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이 모든 과정은 당 최고 지도부가 주도했기에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2명의 의원이 처벌됐다지만 이들 역시 속죄양이었다. 그랬지만 진상이 까발려지면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평민당은 수서 비리 규탄 대규모 군중대회도 개최한다. 박관용 실장의 자조(自嘲)처럼 이런 게 정치세계다.

 

1997년 2월13일 한보 특혜 대출 의혹 사건과 관련,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돼 구치소로 향하는 김우석 전 내무부 장관.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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