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 짐 되기 싫어 선택한 자살
  • 서종한 | 프로파일러 (사이몬프레이저대학 정신건강법 (.)
  • 승인 2016.04.28 17:53
  • 호수 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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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진 한국 현대사가 안겨준 마음의 병심한 고소공포증에도 아파트 17층에서 투신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에 살던 50대 중반 김민형씨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큰아들이 외출한 틈을 타 베란다에 놓인 화분을 딛고 올라선 후 뛰어내린 것으로 보였다. 17층이어서 그런지 베란다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로 아찔했다. 유족의 말로는 평소에 창문 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로 고소공포증이 심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으니 당연히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후향적 자살 사망 경로

어린 시절(13세 이전)

제주 4·3 사건과 집안의 어려움

김씨의 가족은 사업을 하던 할아버지를 따라 제주도로 내려왔다. 하지만 제주도 4·3 사건을 계기로 할아버지가 무고하게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가사는 모두 할머니와 장남이었던 아버지가 도맡게 됐다. 고인은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런데 아버지가 노름에 빠지면서 그동안 모아뒀던 재산을 탕진하고, 그해 술을 먹고 귀가하다 동사하고 만다. 어머니는 육지로 건너가 돈을 벌어 제주도에 남겨진 자식들에게 돈을 부쳤다. 할머니가 남겨진 가족들을 돌봤고 장남이었던 고인이 할머니를 도우며 함께 지냈다. 끼니를 때우지 못할 정도로 생계가 많이 어려웠지만 명석했던 고인은 여동생을 뒷바라지하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래서인지 막내 여동생과 특별히 친하게 지냈다.

10대 시절(1970~80년대 초반)

광주민주화운동과 여동생의 사망

유신정권 시절 제주도를 떠나 광주에서 여동생과 함께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당시 막내 여동생은 고등학교 1학년, 고인은 3학년이었다. 하지만 광주민주화운동 때 귀가 중이던 여동생이 군인이 쏜 총에 맞아 갑자기 사망했다. 그 충격으로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진단을 받아 1년을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군인이나 군 관련 기사 및 영화를 보면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며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년간의 치료로 어느 정도 회복이 된 후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광주대학교 수의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20대 시절(1980년대 후반)

정신분열증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작은 동물병원을 차렸다. 친구의 소개로 선을 봤고 다섯 살 연하의 제주도 여성과 결혼을 했다. 당시에는 동물병원이 거의 없었던 터라 거의 매일 영업을 할 정도였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병원에서 보내며 바쁘게 생활했다. 그는 혼자 있으면 지나간 기억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손님이 없어도 밤늦게까지 퇴근을 하지 않고 서류와 수술 준비를 미리 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이쯤부터 정신분열 증세가 나타나 스스로도 증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철저히 고립된 생활을 이어갔다. 큰아들이 성장한 후 고인의 병원 행정 업무를 도왔다. 고인의 정신분열 증상이 심해지면 큰아들이 고인을 도와 병원 일을 맡아줬다. 병원 운영에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점차 불안감이 심해졌고 대인관계를 일절 가지지 않았다. 정신분열이 심해지면서 처음으로 입원 병동에 들어갔지만 약물 치료와 전기충격 치료의 부작용이 심해 힘들어했다. 계속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고 군인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등 증상이 호전되지 않았다.

ⓒ 일러스트 임성구


30~40대 중반(1990년대 초반)

부인의 외도, 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

그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었다. 큰아들은 그의 곁에서 함께 있었지만 고인의 만성적인 정신장애를 지켜보는 걸 힘들어했다. 큰딸은 고인에게 무심했고 그의 괴이한 정신장애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찍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고인이 죽기 전까지 가족들과의 만남을 회피했다. 미혼이었던 막내딸은 유일하게 고인을 이해하는 편이었다. 고인과 함께 외래진료를 다니며 경제적인 도움을 줬고 힘든 상황에서 조용히 말동무가 돼줬다. 유일하게 고인과 말이 통했던 자식이었다. 부부관계는 서로 무신경했다. 부인의 외도가 시작됐지만 고인은 이를 애써 모른 척했다. 자신의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하며 참고 지내기로 했다. 하지만 부인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고인은 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을 받았고 분열 증세가 더 악화됐다. 곧 두 번째 입원 치료를 시작했다. 이후 증세가 개선되면서 퇴원 후 외래진료가 반복됐다. 부인의 죽음 이후 고인과 가깝게 지냈던 조카가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며 치료를 받다가 병원에서 목을 매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를 고인이 알게 됐다.

50대 초반(2000년대 초반)

어머니의 죽음과 정신분열증

부인 사망 이후 10여 년간은 증세가 호전되고 악화되기를 반복했다. 큰아들이 옆에서 고인을 보살펴주며 함께 동물병원을 운영했다. 하지만 정신분열증 약의 부작용으로 힘들어하며 복용을 주저했다. 곧 증세가 악화됐고 세 번째로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이후 동물병원을 큰아들에게 물려주고 집에서 쉬며 지냈다. 그 와중에 함께 거주하던 어머니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말벗이 돼주던 어머니에게 많이 의지해서인지 고인의 상실감은 아주 컸다. 그 이후 더욱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칩거하며 지냈다. 정신분열 증세가 좀 더 심해지자 복용하는 약을 늘려갔다.

자살 한 달 전

환청 이외에 또 다른 증상이 나타났다. 물건을 사러 마트에 갔다가 집을 찾지 못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자 재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로부터 치매가 상당히 진행돼 앞으로 기억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츠하이머 진단이 정식으로 내려졌다. 이후 집에서도 불안해하며 불면증이 생겼고 한밤중에 가족들을 깨우는 등 힘든 나날이 지속됐다.

자살 일주일 전, 그리고 자살 당일

자살 일주일 전 고인은 자신을 부르는 죽은 여동생의 나지막한 음성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계단을 딛고 뛰어내리려는 순간 뒤따라온 큰아들이 끌어안아 겨우 자살을 피할 수 있었다. 고인은 여동생이 죽었던 광주로 돌아가 사랑했던 동생을 만나고 싶다며 울먹였다. 그다음 날 큰아들이 동물병원으로 출근하려 하자 마지막으로 함께 있어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정오까지 고인과 함께 있던 큰아들은 고인이 잠든 것을 보고 병원으로 출근했다. 오후 5시30분쯤 아들이 돌아오기 직전 그는 베란다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자살 경로 통해 확인한 자살 위험 요인

만성적 위험 요인(CHRONIC RISK FACTOR)

학생 시절 군인에 의해 죽은 여동생을 보호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을 평생 가지고 살았다. 정신분열증이 발병하면서부터 30년간 환청과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군인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바깥출입을 꺼려했다. 고인의 친가 쪽으로 정신분열증 가족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가족력이 의심된다. 부인 사망 이후 정신분열 증세가 더 심해지며 무기력감을 호소했다. 혼자 어머니를 돌보며 남겨진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정신분열증으로 힘들어하면서도 참고 생계활동을 이어갔다. 자살 사망일을 기준으로 지난 15년간 대외활동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대인관계를 맺고 지내는 사람이 가족 외에는 없었다. 철저히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온 것이다. 그의 평소 성격도 한몫했다. 그는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 했고, 부정적인 정서를 가졌으며, 의심과 망상도 심했다. 겁이 많은 성격으로 인해 주변과 조그마한 문제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군대나 군인과 관련된 내용을 매스컴에서 발표하면 방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주변의 스트레스에 매우 취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급성 및 촉발 위험 요인(ACUTE RISK FACTOR)

자살 직전 정신 질환과 불면증이 심해졌다. 극도의 불안감을 보이기 시작하며 주변인들과의 접촉과 관계를 회피하는 경향이 더 심해졌다. 이때쯤 가족 몰래 약물 복용을 줄여나갔다. 자살하기 한 달 전쯤부터 공포심과 불안감이 극에 달해 주변에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사망하기 일주일 전쯤 병원에서 정식으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자식들에게 부담감을 주는 것 같다며 “빨리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보호 요인(PROTECTIVE FACTOR)

부인 사망 이후 자신의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준 막내딸의 따뜻한 돌봄이 있었다. 고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약물 복용을 확인하면서 외래치료에 적극적으로 함께 나서 도움을 줬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수의학과를 나왔고 병원 일을 도우며 함께 생계를 유지해나갈 수 있게 했다. 병원 문을 닫지 않고 운영할 수 있었던 데도 큰아들의 도움이 컸다.

자살 전 ‘죽음’ 표현 빈도 급격히 상승

사망 전 자살에 대한 신념을 구두로 보고한 일이 분명 있었다(Suicide Ideation). 과도한 마약성 약물 복용이나 알코올 중독 증세는 없었고 술도 전혀 마시지 않았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이후 무기력감을 심하게 호소하고, 가족에게 짐이 된다며 “죽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Purposelessness). 사망 직전에는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심을 느끼는 등 분주하게 움직임이 많아지며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Anxiety).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환청이 심해지면서 이 상황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Trapped).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표현을 혼자 중얼거리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멀리하며 칩거했다(Hopelessness, Withdrawal). 싸움이 날까 두려워서 주변인에게 화를 내거나 감정을 내비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Anger). 기타 무모한 행동(Recklessness)이나 드라마틱한 기분 변화(Mood change)는 보이지 않았다.

고인의 자살 생각과 의도 표명, 그리고 치명성은 생애 경로를 추적해보면 충분해 보인다. 자살이 임박하면서부터 직간접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 노출과 표현의 빈도가 급속히 상승했다. 불안감이 극에 달한 이후부터 “죽고 싶다”는 표현을 하며 가족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 했다. 특히 자살하기 일주일 전 비슷한 자살 시도를 보인 점은 치명성의 결정적인 증거로 볼 수 있다. 결국 가장 비슷한 방식으로 자살을 했다. 이런 점을 볼 때 생애 경로에서 자살 위험 요인이 충분한 임계치에 다다른다면 사망자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투신자살을 할 수 없다는 가설은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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