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과 불통 레드카펫을 걷어차다
  • 부산=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6.05.05 18:28
  • 호수 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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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와 영화인의 갈등으로 존폐 위기 맞은 ‘부산국제영화제’의 해법은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개최하겠다.” 1995년 부산의 첫 민선 시장으로 당선된 문정수 시장의 공약 중 하나는 영화제 개최였다. 그런데 막상 시도해보려니 경험도 없었고 공무원들이 그 제안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당시 문 시장의 의욕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BIFF)의 개막식이 열리는 남포동 ‘비프광장’의 보도블록이 문제가 됐다. 영화제를 위해 투스콘으로 깔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문 시장이 이를 도로과장에게 지시하니 “이건 어려울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못한다고?” 도로과장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됐다. 이토록 전임 부산시장의 영화제에 대한 집념은 강했다.

그렇게 의욕적으로 시작된 BIFF의 첫출발은 정말 허름했다. 지금이야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해운대의 현대식 건물에 레드카펫이 깔리면서 멋들어진 광경을 연출하지만, 1996년의 1회 영화제는 좁디좁은 비프광장의 오래된 극장에서 열렸다. 개막식 다음 날에는 극장 안에 쥐가 출몰해 난리가 나는 일도 있었다. 그 쥐를 잡으려고 고양이를 극장 안에 풀었더니 울어대는 통에 또다시 고양이를 잡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고난의 행군을 거친 BIFF는 이제 아시아 최고 영화제가 됐다.

올해로 21번째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좌초할 위기에 처했다. ‘영화인 vs 부산시’의 갈등을 해결할 골든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 연합뉴스

그사이에 여러 차례 고비도 있었다. 특히 부산시와 크고 작은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결국 BIFF의 뜻대로 이뤄졌다. 자율성과 독립성이라는 정언(定言)명령은 고비마다 중요한 잣대가 됐다. 그런데 이번의 고비는 가파른 것 같다. 부산시와 영화계의 갈등, 나아가 서병수 부산시장과 이용관 전 BIFF 집행위원장의 갈등은 20년간 쌓아온 BIFF의 역량을 일거에 무너뜨릴 모양새다.

9개 영화단체들 “부산영화제 참가 거부”

갈등의 시초는 2014년 19번째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다이빙 벨>이다. 부산시는 상영 중단을 요구했고, 영화제 측은 자율성을 내세우며 상영을 강행했다. 이후 감사원과 부산시는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에 대해 강도 높은 감사를 실시했다. 감사원 감사 결과를 토대로 이 전 위원장은 검찰에 고발됐고 BIFF 집행위원장에서도 물러날 것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영화제 측은 개인적인 부정이나 비리가 아닌 회계상의 미숙과 사소한 잘못으로 사퇴를 요구하는 건 정치보복이라며 일축했다. 부산시와 BIFF의 대립이 시작된 계기다.

사태 해결을 위해 접촉도 했지만 합의는 요원했다. 올해 2월18일 서병수 시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조직위원장 자리를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발표했다. 부산시장은 당연직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동시에 2월에 임기가 끝나는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도 동반 사퇴하는 형태가 됐다. 2월25일의 BIFF 정기총회 자리는 공개행사로 열렸고, 자연스레 갈등도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사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새로 민간 조직위원장을 선출하기 위한 정관을 개정하는 것, 그리고 이 전 위원장의 재위촉 문제였지만 두 안건은 모두 빠져 있었다.

대신 영화제 측은 정관 개정을 요구했다. 서 시장의 민간 이양 약속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라는 얘기였다. 이 전 위원장의 거취는 정관을 우선 개정한 뒤 고려하겠다는 게 영화제 측의 입장이었다. 날카로운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기타 안건 토의가 시작되자 자문위원들은 102명의 서명을 바탕으로 정관 개정을 위한 임시총회 소집을 요구했다. 그러자 서 시장은 “소집 요구에 대해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총회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퇴장해버렸다. 이 전 위원장의 재위촉 문제는 협의가 되지 않았고, 2월26일 임기가 만료되면서 그는 BIFF의 수장에서 물러나게 됐다.

결국 9개 영화단체들이 모여 만든 ‘부산국제영화제 지키기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4월18일 보도자료를 통해 “2016년 21회 BIFF 참가를 전면 거부하기로 결의했다”고 밝히면서 <다이빙 벨> 갈등은 영화제의 존폐로 연결됐다. 여기까지가 사태의 큰 흐름이다.

지금 ‘부산’이라는 키워드로 쏟아지는 기사들 중 상당수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BIFF를 다룬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부산의 한 지역 영화인의 얘기다. “영화 하면 부산이 먼저 떠오르게 만드는 기간 동안 영화제를 키우려는 부산시의 지원 노력은 무척 중요했다. 그런데 그 앞의 시장들과 지금의 서병수 시장은 같은 당에 있는 분이고, BIFF의 관계자들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같은 사람들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시장이 바뀐 거밖에 없다. 도대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 누가 득을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친박’ 서병수 시장의 코드인사 논란도

BIFF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 모두는 서병수 시장의 ‘실책’을 말하고, 그것이 심각한 문제였다는 데 동의한다. 자율성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훼손한 것이 중대한 사건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그가 왜 그럴까에 의문을 가질 뿐이다. 부산의 한 지역 언론인의 얘기다.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서 시장이 서 있다. 자율과 독립이라는 가치를 건드리는 건 정치인이라면 택해서는 안 될 싸움인데 진의가 궁금하다.”

서 시장이 문화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다소 남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BIFF로 한창 시끄러웠던 3월, 부산에서는 부산영상위원회라는 조직의 새 운영위원장 선정 문제가 이슈가 됐다. 부산영상위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조직으로 부산 영화산업의 산업적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다. 사실 부산에서 영화 촬영이 많이 이뤄진 데는 부산영상위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영화 촬영에 소방차가 필요할 수 있다. 과거에는 직접 제작진이 나서서 섭외를 해야 했다. 그런데 부산에서는 부산영상위가 소방서에 공문을 보내 협조요청을 해줬다. 관(官)이 나서서 영화 촬영을 지원해준다는 상식이 없던 시기에 벌어진 혁신적인 일이었다. 지금은 다른 지역에도 영상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이런 협조는 상식이 됐다. 보통 부산영상위의 운영위원장은 영화인이 임명된다. 영화인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다. 그런데 공석인 새 운영위원장 하마평에 오르던 사람은 서 시장의 측근이자 비영화인 교수였다. “부산영상위 수장에 대한 밀실 내정설은 사업 실행의 객관성과 중립성, 공정성을 해치는 정치적 편향 인사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부산영상위 역할 위축이나 변질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다.”(주유신 영산대 교수) 나빠진 여론을 의식한 듯 결국 운영위원장은 언론인 출신 인사가 됐다. 최악은 피했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서 시장이 문화계를 다루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됐다.

그렇다 보니 숨은 의도에 주목하는 불신의 시선이 적지 않다. ‘친박(親朴)’ 핵심인사로 통하는 서 시장이 BIFF를 다루는 방식과 박근혜 정부가 문화계를 다루는 방식이 닮았다는 얘기다. 현 정부에서는 초반부터 문화계와 관련된 이슈가 많았다. 출범 초기에는 청와대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인사에 개입해 논란이 일었고, 문화 관련 기관의 코드인사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대통령의 관심 사항인 명품 전시회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경질된 것이라는 주장과 서귀포 예술의전당에서 강정국제평화영화제를 ‘정치성’을 이유로 대관해 줄 수 없다고 결정한 일 등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런 일련의 흐름과 BIFF가 궤를 같이한다는 게 핵심이다.


부산시 “이용관 전 위원장에 한 방 먹었다”

부산시는 영화제의 독립과 자율성에 관해서는 손톱만큼도 침해할 의도가 없다고 강조한다. BIFF 측과의 대화 파트너로 나서고 있는 이준승 시정혁신본부장은 오해라고 강조했다. “영화인들이 보기에는 (BIFF가) 영화인이 주가 되고 20년을 끌고 왔다고 보는 게 당연하다. 우리는 합리적인 선에서 정관이 개정되고 사람이 아닌 시스템으로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다. 사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는, 드러나진 않았지만 의사소통 부분에 있어서 기대와 실망이 있어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부산시 고위 관계자는 ‘불신’을 말했다. “이용관 전 위원장의 태도 변화가 (서 시장에게) 결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고 말했다. 영화계가 부산시에 ‘불신’을 이야기하듯 부산시 역시 영화계에 ‘불신’을 말하며, 서로 ‘불통’에 이른 셈이다.

앞선 부산시 관계자는 총회를 예로 들었다. “이용관 전 위원장의 태도 변화가 결정적이었다. 총회가 있기 전에 이 전 위원장이랑 부산시 관계자가 만났다. 그리고 이 전 위원장이 총회에서 사퇴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 원래 총회에 서 시장은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이래저래 정리가 됐으니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자고 해서 나간 거였다. 그런데 사퇴에 대해 아무런 발언이 없으니 서 시장 입장에서는 ‘이게 뭐지?’ 했을 거다. 오히려 영화인들이 비상총회 이야기를 꺼내면서 한 방 맞은 셈이 됐고 서 시장이 총회 자리를 박차고 나간 모양새가 됐다.”

영화계 역시 부산시에 대해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비대위에 몸담고 있는 한 제작자의 얘기다.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정관 개정을 요구하려고 비상총회를 원했지만, 결국 열리기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조직위원장 역시 총회에서 이뤄질 것을 요구했지만, 이것도 마찬가지다. 총회에서 선출이 안 되면 결국 부산시가 원하는 사람을 앉히고, 서 시장이 수렴청정한다는 오해를 사기 딱 좋지 않나.” 평행선을 달리는 셈이다.

2015년 8월25일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나란히 앉은 서병수 부산시장(가운데)과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오른쪽). 서 시장은 조직위원장에서, 이 전 위원장은 집행위원장에서 물러났다. ⓒ 연합뉴스


“김동호 전 집행위원장을 다시 모셔야” 제안

불통이 지속되는 동안 영화제는 파행을 걱정할 단계를 넘어 무산(霧散)을 걱정해야 할 단계에 왔다. 물리적 진행이 더디다. 올해 BIFF는 10월6일에 개막한다. 하지만 지난해 120억원의 예산 중 4분의 1을 차지했던 스폰서 계약이 기업들의 참여 저조로 진척이 더디다. 당장 영화제 출품작도 줄어들 수 있다. 작품을 선택하는 프로그래머들의 업무가 차질을 빚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국내 출품작의 경우 “부산에 갈 작품들이 전주(영화제)로 갔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번 진통이 발전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라도 영화제는 반드시 성공리에 열려야 한다.” 합의점을 찾지 못할 때는 중재자가 필요한 법이다. 어쨌건 임명돼야 할 새 BIFF 집행위원장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BIFF 갈등에 지속적으로 함께했던 정명희 부산시의원(더불어민주당)은 “시간이 부족하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조직을 단시간에 추스르고 이끌어가려면 김동호 전 집행위원장을 조직위원장으로 모시는 것이 최상의 답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4월28일 배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정명희 시의원 등은 김규옥 부산시 경제부시장을 만나 김 전 위원장을 추대해달라고 전달했다. 정 의원은 “강수연 집행위원장도 김 전 위원장을 모시고 치러내자는 의견에 동의했다”고 전했다.

일단 부산시에서도 한 걸음 양보할 뜻을 내비치고 있다. “지역인사로 모시고 싶다는 제안을 영화계가 못 받아들였다. 그래서 지역인사와 영화계 추천 인사의 공동위원장을 해보자는 제안도 했었다. 일단 영화제는 열어야 하니 최근에는 영화계와 부산시 양자가 환영할 수 있는 인사로 모시면 좋겠다는 쪽으로 후퇴를 한 상황이다.”(이준승 본부장) 부산시는 칸영화제가 시작되는 5월11일 이전에 임명을 마무리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해결되지 못할 경우 칸영화제에서 해외 영화인들이 BIFF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부산시에 큰 부담이 된다. 해운대의 레드카펫이 올해도 넓게 펼쳐질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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