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와 송일국은 이란의 국빈급 스타
  •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5.26 20:32
  • 호수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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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안방극장 점령한 ‘한류 사극’, 보수적이면서도 적당히 자극적인 화려함과 재미로 어필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이란 방문 중에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란의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직접 한국 드라마를 언급한 것이다. 그는 “<주몽>을 자주 봤다”며 “<주몽>은 매력적인 TV 시리즈다. 많은 이란인이 본다”고 했다는 전언이다. 

 

이것이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인 것은 다른 나라도 아닌 이란의 최고지도자 입에서 외국 상업 드라마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란은 신정일치(神政一致) 국가이기 때문에 이란의 최고지도자는 곧 종교지도자다. 최고 종교지도자가 이슬람 율법에 의거해 세속권력을 통제하는 것이 이란의 체제다. 이란은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종교혁명을 통해 극도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사회가 되었다. 

 

하메네이는 바로 호메이니의 뒤를 잇는 지도자로서 이란의 보수적인 종교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한국 드라마 이야기를 한 것이다. 평소 하메네이는 외국 지도자를 만났을 때 웃는 일이 거의 없는데, 이번엔 박 대통령과 한류 드라마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보였다고 한다. 한국 드라마가 이란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에피소드다.

 

 

 

<대장금> 이란 평균 시청률 57%, 최고 90%

 

주한 이란대사관은 2015년 신년기념행사에 이영애를 초대했다. 당시 하산 타헤리안 이란대사는 “이영애는 이란에서 엄청나게 유명하며 인기도 대단하다. 양국 간 문화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했고, 이영애에게 몰려든 이란 입장객들 때문에 연회장 입구에서 준비된 좌석까지 이동하는 데 10분이 넘게 소요됐다. 이날 거의 국빈급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이영애가 이란에서 한류 여신이 된 것은 <대장금> 때문이다. 2006년에 <궁궐 속 보석>이라는 제목으로 이란에서 방영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시청률이 평균 57%, 최고 90%라는 수치가 나왔다. 90%에 잡히지 않은 10%는 TV를 거의 틀지 않는 가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TV 시청 가구는 거의 모두가 <대장금>을 봤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이슬람 금식 기간인 라마단 중에 밥은 굶어도 <대장금>은 거르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고, 방영 시간엔 거리가 한산해졌다고 한다. <대장금>에서 ‘한상궁’ 역할을 했던 양미경이 이란을 방문했을 때는 공항 주변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최근 이영애가 촬영에 돌입한 신작 드라마인 <신사임당>의 행사장에 이란 취재진과 기업인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올 1월에 한국 기자가 이란을 방문했는데, 현지인들이 “이란 경제와 제재 해제 전망 같은 심각한 얘기를 하다가도 이영애라는 이름만 나오면 얼굴이 저절로 펴졌다”고 할 정도로 아직까지 이영애의 인기가 식지 않았다고 한다. 

 

송일국은 2008년부터 방영된 <주몽> 때문에 이란 한류의 왕자에 등극했고, 주한 이란대사관의 2014년 신년기념행사에 초대됐다. 2009년 송일국의 이란 방문 당시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일반 경찰보다 더 위에 있는 종교경찰이 경호에 나섰다고 한다. 근엄한 종교경찰도 송일국에겐 사인 공세를 했고, 출국 때는 공항 직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탑승이 늦어지자 비행기가 이륙하지 않고 송일국을 기다렸다고 한다. 당시 송일국을 보겠다며 3일간 단식했다는 아이부터, ‘주몽’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청년, 심지어 ‘소서노’와 결혼하겠다며 자살 소동을 벌인 사람까지 있다는 현지 보도가 나왔었다. 이 드라마들은 그때 한 번 방영으로 끝난 게 아니라 아직까지도 방영되고 있으며, 현지 DVD 가게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2010년 테헤란에서 ‘국제 언론 및 뉴스에이전시 전시회’가 열려 50여 개국 75개 매체가 초대됐는데, 한국 매체 부스에만 ‘이유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현지인들은 한국 남자는 주몽, 여자는 ‘양굼이’(장금이의 이란식 표현)나 ‘소서노’라고 부르며 사진촬영을 했다고 한다. 2011년에 한국 기자가 이란에 갔더니 테헤란 시민들이 “주몽!”을 외치며 다가와 사진촬영을 요청하는 통에 거리를 지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는 르포기사가 나왔었다. 지난해에도 이란에 간 한국 여행객에게 이란 사람들이 주몽과 소서노를 외치며 접근했다는 여행기가 나왔다. 그리고 이번에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가 <주몽>을 언급하기에 이른 것이다.

 

 

5월2일 이란 테헤란의 밀라드타워에서 열린 ‘K-컬처’ 드라마 상영회.

 

제2의 <대장금>과 <주몽>이 기대되는 상황

 

보수적인 종교권력의 상징 같은 인물 하메네이가 공식 석상에서 한국 드라마를 언급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만큼 한국의 사극이 보수적이라는 뜻이다. 종교지도자가 언급해도 무리가 없는 수준인 것이다. 애초에 하지원 주연 사극인 <다모>도 이란 수출을 타진했었으나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너무 심한 노출 때문이었다. <다모> 정도의 사극조차도 통과하지 못할 조건이라면 서구권 드라마는 아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다모> 이후에 심의의 장벽을 뚫은 작품이 바로 <대장금>이었다. 이 정도가 이란 눈높이에 맞았던 것이다.

 

이란은 신체 노출은 물론이고 과도한 애정심리 묘사도 부정적으로 본다. 몸으로 하는 것이든 마음으로 하는 것이든 남녀상열지사는 꺼리는 것이다. <대장금>이나 <주몽>은 남녀상열지사보다 성공 스토리, 영웅서사의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에 이란의 종교적 장벽을 넘어설 수 있었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슬람’(유교=이슬람)이라는 우스개가 떠돌 정도로 우리의 유교적 전통문화도  가부장적이다. 또 충효와 가족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부각되는데, 이런 것들이 이란의 전통적 가치와 맞아떨어진다. 그런 보수적 구조 속에서도 장금이와 소서노는 주체적 여성상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란 여성들에게 대리만족으로 작용한다. 이란의 보수성에 맞으면서 딱 반 보 정도만 개방적인 것이다.

 

오랜 신정일치 체제 때문에 이란엔 볼 만한 콘텐츠가 없다. 당연히 서구적인 오락물을 향한 욕구가 크다. 그러나 여전히 서방에 대한 반감이 있고, 이질감도 크다. 이때 한국 사극이 충분히 보수적이면서도 적당히 자극적인 화려함과 재미, 불온하지 않은 수준의 진보성까지 갖추고 빈틈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번 박 대통령의 이란 방문을 맞아 현지에서 한국 사극 상영회를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이란이 본격적으로 개방에 나서면서 콘텐츠를 향한 시장의 요구는 더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제2의 <대장금>, 제2의 <주몽>이 기대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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