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앞에선 평범한 사람들도 분노했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6.06.0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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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주기 맞은 이한열 열사

정확히 29년 전 오늘인 1987년 6월9일. 이날은 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분수령이 됐던 때다. 그날 연세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 열사(경영학과)의 최루탄 피격 사건이 있었다. 민주화 열망은 청년의 주검 위로 폭발했다. 당시 시민들은 신문에 실린 이한열 열사의 사진을 보고 분노했다. 눈의 초점을 잃은 채 피를 흘리며 힘없이 동료의 품에 안긴 그 모습. 외국기자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군사 정부의 폭력성을 고발하기에 차고도 넘쳤다. 그 폭발한 분노가 민주화 투쟁의 동력이 된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이한열은 6월9일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6·10대회를 위한 연세인 총 결의대회’를 마치고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오후 5시 쯤 최루탄을 쏘며 진입하는 경찰에 쫓겼고 교내 쪽으로 몸을 돌려 달리다 SY44 최루탄에 뒤통수를 직격으로 맞았다. 그가 쓰러진 지점은 교문에서 3m 안쪽인 지점이었다. 교문을 맞대고 대치했으니 최루탄을 발사한 경찰과의 거리 역시 겨우 20m에 불과했다. 쫓겨 들어가던 다른 학생에게 부축돼 경찰의 손을 피한 이 열사는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다음 날 세브란스병원 측이 발표한 이 열사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그는 두개골이 골절됐고 뇌좌상․뇌출혈․뇌이물질 등으로 의식불명 상태였다. 수술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입원한 지 27일만에 22년의 짧은 삶을 마감했지만 입원실에 있는 동안 병원 밖에서는 민주화를 향한 거센 물결이 온 나라에 넘실댔다.

 

1987년 1월14일 벌어졌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민주화 열망에 불을 붙였다. 그해 4월, 전두환 정권의 직선제 개헌 유보 발표는 기름을 부은 결과를 가져왔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로 상징된 외침은 대학만의 고함을 벗어나 도심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피격당한 사건은 반정부 시위가 점점 격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났고 독재정권에 치명타로 되돌아왔다.

 

전국 곳곳에서는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가 열렸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가 곳곳에서 나왔다. 외국 기자들은 직장인들이 빌딩에서 꽃다발과 휴지다발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충격적’이라는 표현을 쓰며 기록했다. ‘넥타이부대’ 등 교문 밖 시민들이 시위에 적극 가세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단순한 학생 시위가 아닌, 시민의 항쟁으로 성격이 변했다. 6월26일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에는 6월 항쟁이 시작된 이후 가장 많은 인원이 모였다. 무려 25만여명이 참여했다. 그리고 결국 군사정권으로부터 6·29 선언을 받아냈다.

 

이한열 열사는 학생운동권의 중심에 있던 인물도 아니었다. 1986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뒤 서서히 사회의식에 눈을 뜨면서 1학년 2학기 이후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으레 그 시기 대학생들이 그랬듯 대학에 들어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알고 분노했던 수많은 보통 대학생 중 한명이었다. 

 

과격한 것도 아닌, 평범한 우리네 아들도 정부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는 7월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볼 수 있었다. 연세대에서 10만여명으로 시작한 추도행렬은 신촌사거리 노제를 지내며 30만여명으로 불었고 서울시청 앞에 다다르자 100만여명으로 늘었다. 대형 태극기와 영정, ‘한열이는 부활한다’ 등이 적힌 300여개의 만장을 앞세운 운구행렬 뒤로 수많은 인파가 장엄하게 따랐다. 그렇게 이한열 열사는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받아낸, 그리고 6월 항쟁을 민주화의 새로운 장으로 만든 역사의 일원이 됐다. 내년 6월9일은 이한열 열사의 30주기가 되는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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