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비사에 휘둘리는 산업은행, ‘무용론’ 다시 고개
  • 송응철 기자 (sec@sisapress.com)
  • 승인 2016.06.14 09:07
  • 호수 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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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택 前 회장 발언으로 ‘산업은행 관치’ 논란 일파만파

검찰 부패범죄특별수사단(특수단)이 ‘첫 타깃’을 대우조선해양으로 정했다. 이를 위해 대우조선해양과 최대주주인 산업은행(산은)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도 벌였다. 대우조선해양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특수단이 1월 출범한 이래 첫 작품이니만큼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탓이다. 긴장하기는 국책은행인 산은도 마찬가지다. 앞서 최대주주로서 대우조선해양 사태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는 비판과 함께, 이로 인해 수조원대의 부실을 낸 대우조선해양에 2조6000억원을 부당하게 지원한 것에 대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홍기택 전 KDB산업은행 회장이 6월8일 언론을 통해 정부의 외압에 따라 대우조선해양에 수조원대 자금 지원이 이뤄졌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관치금융 논란이 일고 있다.
“산은, 정부 외압에 따라 자금 지원”

이런 가운데 산업은행을 향하던 비판의 화살이 정권 실세를 포함한 정부를 향하면서 이른바 ‘궁중비사(宮中秘史)’ 논란으로 확산되고 있다. 홍기택 전 KDB산업은행 회장이 6월8일 언론을 통해 정부의 외압에 따라 대우조선해양에 수조원대의 자금을 지원하게 됐다는 취지의 작심 발언을 한 것이 발단이 됐다. 산업은행 관치 실태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홍 전 회장은 2013년 4월 KDB그룹 회장에 임명돼 현 정부에서 3년여 동안 산은을 이끌어온 인물이다. 2월부터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에 발탁돼 현재 베이징에 머물고 있다.

홍 전 회장은 지난해 10월 청와대 ‘서별관회의’를 거쳐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4조2000억원 규모의 유동성 지원 내용을 전달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는 각종 경제 현안을 막후에서 조정하는 경제부처 고위 당국자들의 비공식 모임이다. 청와대 본관 서쪽 별관에서 진행돼 ‘서별관회의’로 불린다. 홍 전 회장에 따르면, 이 회의에는 당시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 임종룡 금융위원장, 진웅섭 금융감독원장 등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를 거쳐 전달된 정부안에는 산은이 부담해야 하는 자금의 액수와 구조조정의 가이드라인까지 포함돼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애초부터 시장원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으며, 산은은 ‘들러리’ 역할만 했다는 것이 홍 전 회장의 설명이다. 

홍 전 회장 발언의 파장이 일파만파 커지자, 서별관회의 참석자들과 청와대는 “홍 전 회장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라고 진화에 나섰다. 그럼에도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자 급기야 임종룡 위원장이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다. 그는 6월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업구조조정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기억에 의하면 당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실무자들도 함께 모여서 논의를 했다”고 밝혔다. 임 위원장은 또 “내부적으로 어떤 식의 보고가 이뤄졌기에 홍 회장이 서별관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처음 봤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금융 당국은 이미 그 전에 국책은행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했다”고 해명했다. 

홍 전 회장과 임 위원장의 주장이 맞서고 있는 상황이지만, 금융권에선 홍 전 회장의 발언을 단순히 ‘개인적인 주장’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의 말이 산은 관치 실태의 중심을 꿰뚫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산은은 그동안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을 수차례 받아왔다. 이로 인해 막대한 공적자금을 허비한 일도 비일비재했다. 

최근 법정관리에 들어간 STX조선도 그런 경우다. 산은 등 채권단이 지난 3년 동안 4조5000억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투입했지만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다. 홍 전 회장은 STX조선에 대한 지원 역시 서별관회의 결과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STX조선과 팬오션 문제가 불거진 2013년 서별관회의에서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파장이 크다”며 산은에 무조건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를 통해 떠안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후 실사를 거쳐 STX조선은 살리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나와 자율협약으로 갔지만, 팬오션의 경우 채권단이 2조원의 손실을 입을 상황이어서 우여곡절 끝에 법정관리로 방향을 틀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산은이 정부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가장 주된 원인으로는 정부의 낙하산 인사가 꼽힌다. 산은 회장은 사실상 정권이 낙점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청와대와 정부의 입김에 의해서 회장 자리가 채워지다 보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실제 홍 전 회장의 전임이자 이명박(MB) 정부 시절 임명된 강만수 전 KDB산업은행 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 대통령직인수위 경제분과 간사를 지낸 인물이다. 홍 전 회장의 후임인 이동걸 현 회장 역시 지난 2012년 대선 과정에서 금융권 인사들의 박근혜 대통령 지지 선언을 주도한 측근 인사로 분류된다. 

이는 홍기택 전 회장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과 서강대 동문인 홍 전 회장은 대선후보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원을 맡아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스스로를 낙하산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홍 전 회장은 2013년 국정감사에 출석해 “낙하산으로 왔기 때문에 오히려 부채가 없다. 실력으로 보여드리겠다”고 발언해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그랬던 그 역시도 결국 낙하산 수장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6월8일 “산업은행 실무자들도 함께 모여서 논의를 했다”며 홍기택 전 KDB산업은행 회장의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낙하산 인사, 정부 입맛 맞춘 자금지원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를 사전에 알아차리지 못한 배경도 정부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정부에서 대우조선해양 최고경영자(CEO)를 낙점해 내려보내다보니 산은보다 입김이 셀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산은이 제대로 된 감사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 홍 전 회장에 따르면, 산은은 대우조선해양의 부실 징후를 파악하고 관련 자료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심지어 산은 출신의 감사를 대우조선해양 CEO가 해고한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주주로서의 지위와 영향력이 극도로 제한된 것이다. 

그동안 산은이 관리하는 구조조정 대상 회사의 CEO 자리는 관행적으로 정부가 낙점한 인사가 맡는 경우가 많았다. MB 정부 시절 남상태 전 대우조선해양 사장이 연임을 위해 정부 인사들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이는 대우조선해양의 사장직 선출에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대우조선해양 노조는 매번 사장 선출 시기가 오면 정부의 낙하산 인사를 저지하고 나선다. 대우조선해양 노조는 지난해 3월 사장 자리가 공석이 됐을 당시에도 낙하산 인사가 선임될 경우 총력투쟁으로 맞서겠다며 강경한 입장을 내비친 바 있다. 

CEO뿐만이 아니다. 경영을 감시해야 할 사외이사들도 정·관계 인사들로 빼곡히 채워져왔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MB 정부 시절 임명된 대우조선해양 사외이사 18명 중 무려 10명이 정치권 인사들이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에 임명된 사외이사 7명 중 5명도 정치권 출신들도 채워졌다. 새누리당의 이종구 전 의원, 조전혁 전 의원, 이영배 인천광역시장(유정복) 보좌관, 신광식 제18대 대통령선거국민행복캠프 경제민주화추진위원회 위원, 고상곤 자유총연맹 이사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박 대통령의 싱크탱크였던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이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낸 조대환 변호사도 대우조선해양 사외이사 물망에 오른 바 있다. 그러나 낙하산 인사 논란이 제기되면서 그의 선임은 결국 무산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대로 된 경영 감시가 이뤄질 가능성이 만무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의 이런 무분별한 낙하산 인사는 산은 전체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도 지목되고 있다. 산은 자회사의 요직도 정·관계 인사들이 대거 차지하고 있어서다. 홍 전 회장에 따르면, 산은 계열사 직원 중 3분의 2가 정부 및 금융 당국 출신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산은은 민간은행들에 비해 경쟁력이 낮다’는 비판을 받는 배경으로 꼽힌다. 전문성이 아닌 보은성에 기반한 인사가 진행되다 보니, 자연스레 경쟁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은 최근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 혐의와 경영진의 비리 의혹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사진은 경상남도 거제도에 위치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금융 당국 산은에 전격 메스…실효성 의문

산업은행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에 발맞춰 산업발전과 수출증진을 위한 정책금융기관으로 상당한 활약을 해왔다. 이를 통해 한국경제를 고도성장으로 이끄는 데 선도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동안 산은 무용론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개발경제 시절엔 정책금융기관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그 역할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대우조선해양 사태가 벌어진 이후 이런 무용론은 한층 고개를 들었다. 

금융 당국도 이를 의식한 듯 최근 산은에 대대적인 메스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위는 지난해 11월 산은의 역할 재편 방향을 발표했다. 금융위가 제시한 방안 대부분은 대우조선해양 사태를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금융위는 산은이 장기 보유한 자회사 118곳을 3년 내에 집중 매각하기로 했다. 대우조선해양 사례처럼 투자금이 한곳에 오래 머물러 다른 기업들에 대한 투자가 늦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금융위는 또 앞으로 대기업 여신은 줄이고 중견·예비 중견기업의 성장을 돕는 데 역량을 집중하도록 했다. 특히 수익성 악화에 시달리는 조선·해운 등 경기민감산업에 대한 여신은 전면 재검토에 들어간다. 여기에 제2의 대우조선해양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구조조정 기능을 강화하는 조직개편도 단행키로 했다. 

그러나 대우조선해양과 관련해 제기된 산업은행의 문제들이 관치에 의한 것이라면, 이런 재편 작업을 통해서도 무용론을 잠재우긴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궁중비사에 휘둘리고 있는 지금의 산은 문제점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이 못 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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