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3당 합당이 증명한 ‘여소야대는 정계개편 토양’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17 10:40
  • 호수 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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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의 무시와 홀대가 JP의 反YS운동 낳고 DJP연합으로…

김영삼(YS) 대통령의 쇠심줄 고집은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하기야 그런 고집과 집념, 소신이 있었기에 수십 년 인고의 세월을 거쳐 청와대 주인이 됐다. 그리고 YS가 그 긴 시간 믿고 기댄 것은 국민이요, 제도적 장치로선 언론과 국회였다. 그런 측면에서 굳이 26세에 금배지를 단 9선 경력을 말하지 않더라도 의회를 존중하는 의회주의자였음 직하다. 하지만 이는 그 자신이 청와대 입성하기 전까지의 얘기다. 의회는 3권 분립상의 대통령이 아닌, 국정을 통괄하는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받드는 한 축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통령의 뜻을 받드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그 위치를 인정받았다. YS 개인 성정을 떠나, YS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개헌선을 훌쩍 뛰어넘는 219석짜리 매머드 민자당 총재로서 그 초반 위세가 어땠을까는 능히 상상이 간다. 게다가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사정(司正)·개혁의 칼을 쥐고 있었다. 이랬으니 맞서기는 고사하고 고개를 쳐들 세력조차 없는 형국이었다.

 

“YS의 정적인 DJ(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13대 대선에서 패하자 즉각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영국으로 피신했다. 최대의 위협 세력이라고 할 군부는 하나회 숙청으로 완전 제압됐다. 대선 때 DJ보다 YS를 괴롭히고 불안하게 만들었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초죽음이 돼 납작 엎드렸다. 가뜩이나 구 집권세력과 밀착했던 재계는 처분만 기다렸다(대통령 차남 현철을 비롯해 적잖은 민주계 출신들이 ‘검은돈’에 노출된 게 이런 것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과히 틀리지 않는다. 대통령이 돈을 안 받겠다고 선언하자 권력핵심과 줄을 대려는 대기업주 등이 ‘다음 층’을 집중 파고들었다는 것).”

 

 

1988년 13대 총선으로 형성된 여소야대 정국은 완전한 ‘3김 시대’였다. 야3당 대표회담에 모인 김영삼(YS) 통일민주·김대중(DJ) 평화민주·김종필(JP) 신민주공화당 총재.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이 택한 타개책은 YS·JP를 끌어들이는 3당합당이었다.


 

JP와 결별은 YS의 최대 실책

 

“정 회장은 1992년 2월 통일국민당을 창당, 3월 총선에서 득표율 17.4%에 31석을 얻었다. 지지기반이 겹치는 게 빤한 정당의 출현에 YS가 얼마나 긴장하고 분개했는지는 새삼 운위할 필요가 없을 터다. 천문학적 자비(自費)를 뿌리면서 대선 승리를 장담하던 정주영 총재가 그해 12월 대선에서 얻은 16.3%, 388만 표는 괘씸죄를 더하기에 충분했다. YS의 기세에 언론들도 ‘자숙’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정 총재’를 앞장서 응원했던 H언론사도 죽을 맛이었다. 여담이지만 H사 출신으로 YS 정부 각료로 기용된 O 장관의 입장이 어떠했을까는 알 만하다. O 장관이 대통령을 면담할 때면 가능한 한 상도동계 출신 L 차관을 동반한 게 괜한 일이 아니다.”

 

“1997년 15대 대선 때 현대와 H사가 DJ 지원에 발 벗고 나선 것은 당연했다. 아프다던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떼를 끌고 북한에 들어가는 등 DJ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에 맞장구를 쳤다. 때문에 대북 비자금 송금 등에 얽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어쨌든 당시 현대는 YS에 대한 복수에 신명을 올렸다. 심각한 경영위기를 겪던 H사는 DJ 정부의 배려로 숨을 고를 수 있었다(정주영 명예회장은 현대그룹이 집중 세무조사를 받고 자신에 대해선 선거법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수사가 진행되자 선거가 끝난 지 두 달이 안 돼 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도 탈당했다. 통일국민당은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면서 소멸).” 당시 청와대와 민자당 민주계 인사들의 회고다. 박관용 비서실장은 청와대가 별도의 조치를 취할 하등의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DJ의 경우 1987년 대선 당시 단일화 합의를 깨고 출마하는 바람에 군사정부 후계자(노태우 후보)에게 대통령을 진상, 민주화에 역행했다는 국민적 비판을 당한 터라 달리 여지가 없는 게 마땅하다고 했다. 현대에 대한 세무조사가 실시됐지만 저간의 행적이 분명해 정치보복이라는 비판이 끼어들 구석이 없었다는 전언이다(당시 정 회장의 총선·대선에 동원됐던 현대 간부는 “그때처럼 돈을 많이 만져본 적이 없다”고 술회한다. 동원됐던 현대 직원들 가운데는 덕분에 ‘부자’가 된 사람도 꽤 있다고도 했다).

 

이렇듯 국회를 포함한 정·재계를 ‘평정’한 YS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DJ가 떠난 뒤 ‘남은 3김’ JP는 어차피 적수가 아니었다. YS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는 민자당 대표였을 따름이다. 대통령과의 주례회동으로 대접을 받기는 했지만 모양새만 그럴 뿐 당은 최형우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계의 독무대였다. 안팎으로 몰리는 신세가 된 JP였다. JP는 YS를 깍듯이 모셨다고 회고하면서 그러나 YS는 자신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면 일축하기 일쑤였다고 했다(JP는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 후 소속 의원들을 이끌고 청와대에 들어가 ‘홍곡(鴻鵠)의 대지(大志)를 연작(燕雀)이 어찌 촌탁(忖度)하겠습니까-기러기와 고니의 큰 뜻을 제비와 참새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까지 해가며 정성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고 했다). 또 자신을 끌어내리기에 골몰하던 최형우 의원은 급기야 94년 말에는 “민자당에서 대표체제는 없어져야 한다”며 자신을 정면으로 겨눴고, YS는 그런 최 의원을 나무라는 듯하면서도 “정부의 세계화 준비는 끝났다. 이제 당이 세계화를 추진할 차례”라는 말로 자신을 압박했다고 분개했다. 

 

“사실 JP는 이미 오래전 존재 가치를 상실했다. 2인자는 고사하고 귀찮은 ‘노인’이었을 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문민정부의 이미지에 흠집이나 내는 유신 잔재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와 출입기자들의 일치된 회고다.

 

JP는 YS 취임 2주년을 45일 앞둔 1995년 1월10일, 결별을 선언하고 민자당을 떠났다. 그리고 1개월 뒤 자민련을 창당한다. 그의 반(反)YS운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JP와의 결별은 YS의 정치적 선택 중 가장 치명적 실책으로 꼽을 만하다. 무엇보다 YS 자신이 가장 꺼렸던 ‘DJ 대통령’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다. JP는 자서전에서 YS와 민주계의 홀대와 수모가 결별의 원인임을 분명히 하면서 1996년 4·11 총선 후 YS의 자민련 ‘의원 빼가기’가 DJ와 자신이 접근하는 계기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념·지지층 차이 등으로 도저히 연대할 수 없을 것 같던 DJ와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JP는 그해 5월 자민련과 DJ의 국민회의가 공동주최한 ‘신한국당 의원 빼가기 규탄대회’가 DJP연합 성사의 결정적 고리였다고 증언한다(자민련에는 YS에게 당했거나 반목하던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김복동·박철언 등 TK(대구·경북) 중진들이 대거 가세했고, 96년 총선에서 자민련이 50석을 확보하는 대승의 발판이 됐다.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철학 때문에 사람 난에 허덕이던 JP에게 사람을 몰아다 준 주체가 YS였던 셈).

 

포스트 3김 시대…예고된 혼돈

 

1996년 총선 당시 신한국당은 DJ와 JP를 향해 ‘정치인 70세 정년론’을 퍼부었다. JP는 당시뿐 아니라 한참 후에도 나이를 들어 모욕을 준 데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낸 바 있는데 반YS연합전선 구축에 촉매제가 된 요인들은 이외에도 상당하다.

 

1980년에서 2000년대 초에 이르는 3김 시대를 대표하는 단어는 3당 합당과 DJP연합이다. 각기 YS와 DJ 대통령 만들기와 직결된 ‘혁명적 사건’이었다. ‘혁명적’이란 수식은 과거의 정치 기법이나 상상력으론 거의 불가능했으리란 측면에서다. 3당 합당과 DJP연합의 다른 이름은 ‘정계개편’이다. 3김은 ‘정치에 불가능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정당성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떠나 이들은 정치공학(工學)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리고 정치9단들이 펼친 기법들은 포스트 3김 시대에도 변형을 거듭하며 살아 있다. 특히 오늘과 같은 다당제 시대에는 시사하는 바 크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노태우 정권 때 3당 합당은 여소야대(與小野大)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이론의 여지없는 명쾌한 정의다. 이를 그대로 대입하면 머지않아 정계개편 시도가 불가피하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여권이 대책 없이 흔들리고 있고 두 야당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는 등 개편 요인은 수두룩하다. 대통령선거가 1년 반도 안 남았다는 시간적 요소와 3김 시대와 달리 뚜렷한 야권 주자가 없는 점 등도 있을 수 있는 개편의 혼란계수를 높이는 부분이다.  

 

 

그 뛰어난 수사(修辭)의 명인 JP, 그리고 ‘비밀 얘기’ 

 

JP는 분야를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 특히 깊은 조예의 한학(漢學)을 바탕으로 정곡을 찌르는 갖가지 조어(造語)를 남겼다. 때로는 자신의 처지를, 때로는 정치 상황을 함축한 상징과 은유는 가히 일품이다. ‘정치9단’의 경륜과 수준급 수채화 실력, 바둑, 아코디언, 피아노 등 예인(藝人) 재능이 어우러져 나온 수사(修辭)이기에 널리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고사성어들은 JP의 손을 거치면서 새롭게 태어나 관용어처럼 자리 잡기도 했다.

 

국가정보원 전신 중앙정보부 창설자로서 만든 부훈(部訓)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며 양지(陽地)를 지향한다’에서부터 최근 중앙일보 회고록 타이틀 ‘소이부답(笑而不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이 부훈은 1998년 국가안전기획부 때까지 유지됐고 이후 ‘정보는 국력이다’를 거쳐 이명박 정부 이후는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 ‘자의반 타의반(自意半他意半)-5·16 2년 뒤 반대파에 밀려 쫓기듯 외유를 떠나면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군부의 음모를 간과한 채 YS·DJ를 비롯한 정치권이 민주화 시대가 됐다고 들떠 있자’ ‘유신 잔당(殘黨)이 아닌 본당(本黨)-1987년 정계에 복귀할 때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독재 권력의 후예라는 비난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며’ 등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되고 있다. 불교 선종(禪宗)의 공안(公案·깨우침을 위한 물음의 요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화두(話頭)와 같은 뜻) 중 하나인 ‘줄탁동기(啐啄同機)-병아리가 껍질 밖으로 나오기 위해선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1997년 대선을 앞둔 신년휘호’나, ‘이심전신(以心傳神)’은 한국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흔든 DJP연합의 고단수와 복잡다단함을 짐작하게 한다(이심전신은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한다는 以心傳心의 차원을 넘어서 신통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으로, 1998년 DJ와의 관계를 말할 때).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이 문화혁명 때 활용한 조반유리(造反有理)의 ‘유’를 ‘역(逆)’으로 바꾸어 자민련 이탈 의원들에게 경고를 보낸 것 등도 JP의 수와 경지를 말해준다. 이렇듯 한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JP는 평소 일반인들이 잘 사용 않는 우리말이나 충청도 사투리를 동원, 자신의 뜻은 십분 알리면서 후유증은 줄이는 고수였다. DJ와 사이가 틀어졌을 때의 ‘몽니(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심술을 부리는 것)’나, YS와 민자당을 함께할 때 YS가 합의한 내각제 개헌을 못 받겠다며 고향으로 내려가자 내뱉은 ‘틀물레짓(아이들이 떼를 쓰거나 보챌 때 누워서 사지를 버둥거리는 모습)’은 대표적 사례다.

 

 

방한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대권 훈수’를 둔 것으로 전해지는 JP. 올해로 90세가 된 그는 몸이 불편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그런 JP가 5월28일 방한 중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30분간 만난 뒤 “비밀 얘기만 했다”고 밝혔다. 기자들의 무슨 대화를 나눴냐는 물음에 딱 이 한마디 했다. 가뜩이나 반 총장의 사흘 전 ‘2017년 대선 출마 시사’로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나온 말이어서 ‘비밀 얘기’는 ‘반기문 대망론(待望論)’과 맞물려 계속 증폭되는 중이다. 반 총장의 “유엔 사무총장의 역할을 설명 드렸고, 김 총재님께서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신다. 열심히 마지막까지 임무를 잘 마치고 들어오라는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는 물 탄 술 같은 답변과 대비돼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JP는 2004년 정계은퇴 선언을 하면서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고자 했다. 좀 더 장엄하게 정치와 이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총선 참패로 쓸쓸히 퇴장한다며 회한을 토로했는데 때문에 마지막 남은 ‘3김’으로서, 묘책과 격려를 전달한 게 아니냐는 것이 궁금증의 요체다. 그리고 그 묘책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마지막’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온 정치인생을 통해 추구했던 내각책임제인지도 아리송하다. 그는 ‘하얗게 타버린 재’와 ‘서쪽 하늘의 벌건 태양’ 간 괴리(乖離)를 후배들이 메워주길 바랄 뿐이라고 외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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