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나는 국정교과서 찬성론자로 매도당했다”
  • 박준용 기자 (juneyong@sisapress.com)
  • 승인 2016.07.0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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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쟁 불붙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자신과 ‘주류학계’를 구별하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주류학계’의 충실한 일원입니다.” 오항녕 전주대 교수가 《한겨레》기고에서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에 대해 남긴 평가다. 이렇듯 주류역사학계는 이 소장을 ‘공적’이라 부를 정도로 그를 보며 눈을 흘긴다. 비판은 “과도한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신빙성이 부족한 주장을 한다”, “자신의 주장과 맞지 않는 주류학설을 ‘식민사관’으로 몰아간다”, “귀납적으로 역사를 바라보지 않고, 명제를 세워두고 근거를 끼워 맞춘다” 등의 이유 때문에 생긴다.

이 소장은 최근 역사학계에서 두 가지 ‘논쟁적’ 사건에 휩싸였다. 하나는 소송까지 간 문제다. 이 소장은 2014년 9월 출간한 저서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서 김현구 전 고려대 역사교육학과 교수의 저서를 언급하며 “김 교수가 한국 고대사 서술에서 일본 극우파 시각에 동조했다”고 쓴 혐의로 기소됐다. 서울서부지법은 이 소장의 명예훼손혐의를 인정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또 하나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정부 지원으로 만든 ‘동북아역사지도’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의 식민사학의 내용을 반영해 제작됐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제 이 ‘문제적 남자’는 다시 역사논쟁의 중심에 설 전망이다. 그는 6월26일 재야 사학계 연합체인 ‘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 협의회(미사협)’ 공동대표로 나섰다. 이 단체에는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은 인사들이 합류했다.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ㆍ해양수산부 장관이 상임대표를 맡았고,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상임고문으로 합류했다. 서울 마포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이덕일 소장을 직접 만났다.
 

 


언론과 강단사학계에서 이 소장을 ‘유사 사학’이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박사학위를 떠나서 사이비, 유사사학이라고 명명할 권한을 누가 가졌나. 결국 프레임이 다 짜인 거라고 생각한다. 식민사관의 카르텔이 내려오는 것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다. 언론이 나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고 분노해서 전화 오는 분도 있었다. 특정 인물을 죽이려하는 것이다.

국정교과서에 대해 입장이 뚜렷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나를 국정교과서 찬성론자로 몰고 가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런데 나는 예전부터 국정교과서 비판을 했다. 2001년도에 ‘국정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글을 써서 아주 강하게 비판했다. 나는 국정교과서 반대론자로 피해를 봤고, 보신각에서 국정교과서 반대 특강도 했다. 나를 국정교과서 찬성으로 모는 건 유신 때 용공 조작 같은 느낌이다.

과거 한국의 영토 확장과 신화 부분에 대해서 연구력을 집중하는 것 같다.


내가 없는 영토를 려서 했으면 역사 방법론을 벗어나니까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주장하는 것은 중국 고대 사료에 나온다. 비판하는 사람들 뿌리를 내가 안다. 조선총독부 때부터 시작해서 (식민사관) 내려 온 것이다. 이 문제는 한국 고대사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영토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 답사를 다니다보면 중국이 북한을 차지하고 동북4성을 만들려 한다는 게 실재하는 얘기다. 2012년도에 중국이 북한 북쪽이 자기네 역사라고 미국 상원에 보고서를 냈다. 영토전쟁이다. 그런데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자는 미국 상원에 그 내용이 맞다고 했다. 내가 “그게 아니다”로 대응하라고 했다고 이렇게 사방에서 달려들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만든 지도가 의도적으로 왜곡됐다고 보는 이유는 뭔가. 단순 착오였을 수도 있지 않은가. 


동북아역사지도 담당책임자들이 논문을 쓰고 글을 쓴 게 있다. 독도가 우리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독도연구소 연구위원이고 그 사람이 동북아역사지도 책임자다. 독도가 우리 것이라는 전제가 명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그렇게 쓴 사람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사건이 미사협의 출범 계기인가.


동북아역사재단, 나의 유죄판결이 직접적인 계기다. 내가 유죄 판결을 받은 뒤 대책 회의를 했다. 사학자들이 이건 나의 개인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재야사학자들이 뿔뿔이 흩어져있는데 큰 조직으로 한 번 해보자고 했다. 동북아역사재단 지도 사건 때 들끓던 재야 여론이 나의 유죄사건이 임계점이 돼 폭발했다.

김현구 전 교수의 주장을 ‘식민사관’이라 주장했다가 1심 유죄 선고를 받았다. 


백범 김구를 일본으로 도망간 깡패라고 하고, 유관순 여사를 깡패라고 욕한 사람(김완섭 작가)이 있는데 75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한 나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이 나왔다. 이게 말이 되나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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