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의 생생토크] 당신이 히딩크야? 난 김병지거든
  •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8.19 14:46
  • 호수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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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로 살아온 35년 축구인생 마감하는 골키퍼 김병지 인터뷰…현장 경험 전달하는 해설가로 변모
706(통산 최다 출장), 754(통산 최다 실점), 229(최다 무실점 경기), 153(최다 연속 무교체 출장), 4(K리그 베스트11(GK)), 그리고 3(골키퍼 최다 득점). 45년5개월15일의 나이에 그가 그린 그라운드의 ‘족적’들이다. ‘한국 축구의 살아 있는 전설’ 김병지가 35년의 현역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자신의 은퇴 소식을 개인 SNS를 통해 알렸다. 장문의 글로 자신의 축구 인생을 돌아본 김병지는 글 말미에 “나 떠난다. 내 젊음이 머물렀던 녹색 그라운드를 떠난다. 내 청춘이 머물던 곳, 사랑한다 K리그”라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1992년 울산 현대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한 뒤 포항 스틸러스, FC 서울, 경남 FC, 전남 드래곤즈를 거치며 24시즌 동안 K리그 개인 통산 최다인 706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던 김병지. 그는 선수 생활 내내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78.5kg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몸무게였다. 은퇴 후 각종 인터뷰와 방송 출연 및 해설위원 데뷔 준비로 정신없이 보내는 김병지와 인터뷰 약속을 잡으며 필자가 내건 조건은 딱 한 가지였다. ‘취중토크’ 형식으로 인터뷰가 진행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김병지도 흔쾌히 ‘오케이’했다. 며칠 후 소주를 마시지 못한다는 그와 시원한 생맥주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상당히 어색했다. 

맥주 마시며 인터뷰하는 건 처음일 것 같다. 

“처음이다. 이런 분위기가 낯설지만 재미있기도 하다. 술을 안 하다 보니까 못 마시는 수준이다. 지금은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고, 은퇴 후 인터뷰도 많이 했지만 ‘취중토크’라서 신선하게 느껴진다.” 

선수생활을 하다 보면 유혹이 많을 텐데, 그걸 어떻게 참고 견뎌냈나. 

“당연히 처음엔 힘들었다. 선배들도 이해를 못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안 놀고 안 마시는 놈’이 되었고, 그렇게 찍히니까 오히려 편해졌다. 선배가 아무리 (술을) 마시라고 협박해도 안 마셨다. 술만 안 먹었지 잘 어울리기는 했다.”

은퇴를 구단이나 연맹을 통하지 않고 개인 SNS에 밝혔다. 그걸 보면서 ‘김병지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7월19일), 전남 광양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다가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뒀던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미 아내와 상의도 했었고, 은퇴를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고민도 됐다. 내가 거취를 정리하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난감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느 팀에선 다시 선수 계약을 맺자고 나섰다. 그래서 결심을 굳혔다. 물론 기자회견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굳이 그런 자리가 필요할까 싶었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휴게소에서 작성한 것이다. 그로 인해 전화도 많이 받았다. 그래도 ‘잘했다’는 얘기보다 ‘아쉽다’ ‘좀 더 뛰지’란 얘기를 많이 들어서 위안이 됐다.”

은퇴 후의 행보가 궁금했다. 첫발을 축구 해설위원으로 시작하더라. SPOTV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해설로 데뷔한다고 들었다. 

“8월13일 크리스털 팰리스와 웨스트 브로미치의 EPL 개막전부터 투입된다. 그동안 리허설을 많이 했는데 말을 잘하는 것과 방송을 잘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한동안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축구를 해 왔던 것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재미있게 해내고 싶다. 현재 축구 마니아들 중에는 EPL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은 현장의 경험과 경기 중의 상황을 적절히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거다. 어떤 해설위원은 골키퍼가 페널티킥을 차는 키커의 발 모양을 보고 위치를 판단한다고 설명한다. 아마추어는 가능하다. 프로에서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 만약 발 모양을 보고 막았다면 거의 다 막았을 것이다.”

그럼 페널티킥 상황에서 골키퍼는 어떤 판단을 하고 대응하나. 

“미리 예측할 수가 없다. 그리고 골키퍼는 절대 몸으로 미리 예측해서 움직이면 안 된다. 물론 우연히 방향이 맞으면 기가 막힌 세이브가 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필드 플레이어 출신보다 골키퍼 출신의 해설이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야구의 포수, 농구의 가드처럼 골키퍼도 경기 전체를 보는 눈을 갖고 있다. 필드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정확하다. 선수는 자신과 볼 외에 뒤쪽엔 시선을 둘 수 없지 않나. 반면에 골키퍼는 필드 전체를 보고 ‘잡아’ ‘돌아서’ ‘프리야’ ‘붙었어’ ‘왼쪽이야’ ‘오른쪽이야’라고 리딩해 줄 수 있다. 심리전에 가장 능한 포지션이 골키퍼이다. 골과의 싸움에서 많이 부딪히다 보니 공격수의 마음을 읽게 되는 것이다. 공격수는 자신의 플레이만 얘기할 수 있지만 골키퍼는 전체를 보기 때문에 필드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디테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

지난해 7월 700경기 출장이란 대기록을 달성했을 때 777경기 출장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결국 그 숫자는 채워지지 못했다. 

“계획대로 흘러갔다면 어느 팀과 계약을 했고, 2년을 더 선수로 뛰었을 것이다. 경기력이나 컨디션만 놓고 본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그라운드에 나갈 수 있다. 지금이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이기 때문에 은퇴시기를 정한 것이다.”

언남고에서 축구선수로 뛰고 있는 장남 태백군과 프로 무대에서 함께 뛰는 ‘부자 매치’를 언급하기도 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부자 매치’는 꿈도 꾸지 않았다. 인터뷰를 통해 태백이에게 프로에서 함께 뛰자는 얘기는 했지만 그러기엔 내가 기다려야 할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오래전부터 은퇴 후의 일들을 준비해 왔다. 그중 하나가 재단 설립이었다. 주위의 도움으로 사단법인 김병지스포츠문화재단이 최종 승인을 받았다. 해설하면서 재단 일을 통해 축구와 사회 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다.” 

기록을 살펴보면 754골의 실점이 있다. 그 숫자가 뼈아프게 느껴지진 않나. 

“당연히 아프다. 그러나 후배들을 가르칠 때 보면 그 실점들이 경험으로 돌아온다는 걸 절감했다. 경험의 교과서로 내게 도움이 됐다. 754골의 실점은 지금의 김병지를 있게 만든 숫자라고 생각한다. 경남FC 시절 5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을 때의 일이다. 499경기 까지만 해도 실점이 496점이었다. 0점대 실점률을 이어간 것이다. 내심 500경기 때도 0점대 실점률을 기록하길 바랐다. 전북 현대전을 500경기 출장으로 치렀는데 그 경기에서 4실점을 기록했다. 내 축구 인생에서 한 경기 4골을 실점한 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그런데 5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우는 날 4골을 먹었고, 500실점이 되면서 0점대 실점륭이 깨졌다. 정말 억울했다. 경기도 지고, 실점률도 오르고. 축구가, 인생이 생각한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걸 또 깨달은 것이다.”

선수 김병지는 굉장히 지독하고 철두철미한 이미지였다.

“선수로 오래 살아남기 위한 노력들이었다.”

2002년 5월29일 경주 시민운동장에서 실시된 월드컵 대표팀 마무리 훈련에 참가한 히딩크 감독과 김병지 선수가 동료 선수에게 동시에 사인을 보내고 있다.

김병지의 축구 인생에 히딩크 감독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질문이 너무 훅 들어간 건가. 

“예상했던 질문이다. 어떤 기자가 내게 이런 걸 물었다. ‘히딩크 감독의 자서전을 보면 2002년 월드컵 당시 이운재의 컨디션이 더 좋아서 김병지가 아닌 이운재를 주전으로 내세웠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내가 그 기자에게 뭐라고 대답한지 아나. 내가 훗날 자서전을 쓴다면 그 내용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만 말했다. 히딩크 감독도 자서전에 솔직한 얘기를 담았을 것이다. 나도 자서전에는 당시 내가 보고 느꼈던 상황을 솔직히 서술할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2001년 1월, 파라과이전에서 선수 김병지가 중앙선 근처까지 볼을 몰고 나오다 빼앗기는 바람에 실점 위기에 처하지 않았나. 당시 히딩크 감독은 진노했고, 그 후로 주전 자리를 내놔야 했다는 내용이다.

“지금과 같은 지혜가 있었다면 그 즉시 감독님을 찾아가서 ‘죄송하다’ ‘미안하다’며 매달렸을 것이다. 그때는 ‘당신이 히딩크야? 난 김병지거든’ 하는 오기가 있었다. 그 후로 대표팀에 뽑히면 허리 아프다고 쉬고, 그런 내 모습에 히딩크 감독은 내가 ‘개긴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서로 ‘가면’을 쓰고 지냈다. 그것도 아주 불편한 가면을.”

결국 2002년 월드컵에서 단 1분도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다른 경기에는 욕심내지 않았다. 터키와의 3, 4위전에는 1분이라도 뛰게 해줄 줄 알았다. 그러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난 필드에 나가보지 못했다. 월드컵 4강 진출이란 엄청난 결과에 흥분하고 감동하고 선수들과 함께 울기도 했지만 마지막까지 날 외면한 감독의 시선이 안타까웠다.”

축구대표팀은 히딩크 감독 이후 움베르토 쿠엘류(포르투갈) 감독이 잠깐 대표팀을 맡은 이후 요하네스 본프레레,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백까지 줄곧 네덜란드 출신의 지도자가 대표팀을 이끌었다. 2007년 12월 허정무 감독 취임 후 2008년 1월 칠레와의 A매치 때 약 6년 만에 국가대표팀에 복귀했지만 허리 부상으로 중도 탈락하면서 더 이상 대표팀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내가 네덜란드 출신의 지도자들한테는 인정을 못 받는 선수였다. 어쩌면 대표팀과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나 싶다.”

2002년 7월8일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2012 K리그 수원 삼성과 경남FC의 경기에서 경남 골키퍼 김병지가 수원 박현범의 발리슛을 막고 있다.

24년 프로축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나.

“경남FC에 있을 때이다. 팀 선수들은 나이 어린 후배들이 대부분이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조광래 감독이 내게 전적인 신뢰를 보였다. 밀양이 고향인 내게 고향팀을 잘 이끌어달라고 부탁했고, 훈련량은 많아도 마음 편히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남아공월드컵 때도 SBS 해설위원 제안을 받고 고민을 거듭하자 감독님이 다녀오라고 먼저 얘길 해 주었다. 어차피 어디에 있어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믿고 보내준 것이다. 조광래 감독과 함께 보낸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오는 9월18일 울산 현대와 포항 스틸러스의 ‘동해안 더비’ 때 은퇴식이 열린다고 들었다. 유니폼을 입었던 프로팀이 5개 팀이었는데 그중 왜 울산 현대인 건가. 

“K리그 데뷔를 했던 팀이 울산 현대였고, 울산 구단 측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은퇴 소식을 알리자마자 바로 연락을 줘서 은퇴식을 맡겠다고 했다. 울산 현대와 포항 스틸러스의 동해안 더비전은 내게도 큰 의미가 있는 경기다. 1998년 10월, 울산 현대와 포항 스틸러스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공격에 가담한 내가 극적인 헤딩 득점을 올렸고 이후 연장전과 승부차기에서 4-1로 승리하는 바람에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다. 가장 극적이고, 가장 치열했던 승부였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 경기가 회자되는 것 같다.”

골키퍼 출신의 1호 프로팀 지도자를 꿈꾼다는 게 사실인가. 

“한 선배가 내게 이런 얘길 하더라. 일단 프로팀에서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다음 감독으로 가는 게 맞는 수순이 아니냐고. 난 지금까지 프로팀에서 코치와 같은 선수생활을 15년이나 해 왔다. 플레잉 코치도 경험했고, 항상 후배들을 가르치며 선수생활을 했었다. 그런데 다시 코치로 시작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일단 해설을 통해 축구를 보는 시각을 좀 더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그다음 기회가 된다면 감독에 도전할 것이다.”

‘취중토크’면 뭔가 풀어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은퇴한 김병지는 술을 마시나 안마시나 흐트러짐이 없다. 물론 맥주 한 잔도 다 비우지 못했다.

“버리지 못하는 내 스타일이다. 은퇴 후에는 아내랑 와인도 한두 잔 마시며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해설을 하니까 더 집중해야 하고, 더 공부를 많이 해야 하더라. 해설하는 동안에는 술을 못 마실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김병지 인생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마지막으로 꾸는 꿈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구단주이다. 구단 운영이 아닌 경영을 해 보고 싶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그 과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백이랑 선수로 ‘부자 매치’를 이루진 못했지만 구단주와 선수로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실력이 없으면 뽑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이미 마음에서의 은퇴는 2008년 허리수술을 하면서부터였다. 수술을 집도한 선생님께서 이미 내 아내에게 선수로서의 포기와 마음의 정리를 시켰고, 사실을 감추지 못한 아내는 재활에 안간힘을 쓰던 내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좌절을 좌절로 받아들이지 않고 종전 보다 더 의지와 체력을 다지니 또다시 열렸던 선수의 길. 그렇다! 무엇을 하든 어떤 조건에 놓이든 의지와 열정이 있다면 넘지 못할 것이 없음을 또다시 깨닫게 되고, 덤으로 온 지금 나는 내리막이 아닌 새로운 오르막길 위에서 기쁜 마음으로 외친다! 나 떠난다!’
-김병지가 SNS에 남긴 은퇴 인사 내용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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