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감정조절 하며 사는 법...“일단 심호흡하자”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08.25 15:4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트라우마 전문가 권혜경 박사가 말하는 감정조절법

“한국의 서비스 종사자들은 불편할 정도로 친절한 반면,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타인에 대해 참을성이 없다.”

8월23일 시사저널과 만난 ‘뉴욕의 정신분석가’ 권혜경 박사는 최근 한국에서 받은 개인적인 인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권혜경 박사는 세계적인 심리치료 정신분석 연구기관인 NIP(National Institute for the Psychotherapies)에서 훈련을 받은 정신분석가다. 미국 뉴욕대 임상외래 교수로 학생을 지도하고 있으며 뉴욕 맨해튼과 뉴저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정신분석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트라우마 치료전문가인 그는 최근 <감정조절>(을유문화사)이란 책을 출간했다. 

 

권 박사의 말대로라면 우리 사회는 과도한 친절과 지나친 분노가 공존하는 곳이다. 혹시 지금 한국인들은 ‘감정조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감정조절을 출간한 정신분석가 권혜경 박사

<감정조절>을 출간한 정신분석가 권혜경 박사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과하게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안전’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어떤 콜센터 업체에서는 상담직원에 대한 고객평가가 만점이 아니면 사유서를 써야하며 이는 해고사유가 된다고 한다. 이들의 친절함은 공포심이 만들어낸 과잉 친절인 셈이다.” 

권 박사는 감정이란 내가 현재 하는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일차적이고 원초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안전감’은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감정적 여유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안전감은 ‘생존’에 대한 안전감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요인들이 많은 사회에 사는 개인은 감정적으로 안정을 찾기 위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감정조절’이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사회구조적 문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 박사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국내에 트라우마를 다룰 수 있는 치료사 교육을 위해 매년 여름 ‘통합적트라우마세미나’를 가톨릭성모병원에서 운영해오고 있다. 이 세미나는 의사, 간호사, 교사, 심리상담가 등을 대상으로 ‘트라우마 포커스 테라피(Trauma Focus Therapy)’란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공유하고 실습한다. 

 

‘트라우마 포커스 테라피’는 뇌과학과 대상관계·대인관계 이론 등에 근거해 환자의 상황과 특성에 따라 보다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치료를 제공하는 방법이다. 기존의 심리치료는 생각과 감정을 바꿔 우울증․불안장애 등 정신병적 증상을 없애는 쪽으로 치료를 해왔다. 반면 트라우마 포커스 테라피는 몸을 먼저 변화시킨 뒤 감정과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중화된 방법이지만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기존에 많이 사용되던 트라우마 치료법은 말을 통한 심리치료였다. 좌뇌의 기능을 지나치게 많이 쓰는 방식인데, 사람이 트라우마 상태에 빠지면 좌뇌 활동이 중지돼버리는 문제가 있다. 쉽게 말해 누군가가 ‘안전하지 않은’ 상태에 빠지게 되면 그는 이성의 힘이 큰 인간보다는 직관과 본능에 충실한 동물에 가까운 상태가 된다.  따라서 이런 치료법은 큰 효과를 얻기 힘들다. 이럴수록 신체적 접근이 필요하다.” 

사람의 몸은 그 자체로 그가 경험한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은 속일 순 있어도 몸은 속일 수 없다. 때문에 트라우마 포커스 테라피를 이용한 심리치료에서 상담자를 만나면 대부분 가장 먼저 하는 것 중 하나가 자세 교정이다. 권 박사는 “트라우마 상담자는 어깨를 구부리고 몸을 위축시키며 남의 눈에 최대한 띄지 않는 자세를 취한다. 그럴 때 우선 어깨를 바로 펴고 릴렉스하라고 말한다.” 자세를 ‘안전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바꾸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이 찾아온다는 얘기다.

 

 

 

숨 쉬는 법도 중요하다. 권 박사는 “전쟁터의 사람들은 숨도 깊게 못 쉰다”며 “숨을 깊게 쉬게 되면 감정이 올라오기 때문에 이렇게 깊게 숨을 쉬게 해주면 대성통곡을 하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뇌과학을 바탕으로 한 이 치료법은 ‘모든 증상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발현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권 박사는 “증상이란 몸이 나와 나누는 대화”라고 말했다. 

 

“증상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증상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 이해한다면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우울증으로 대인기피 증상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들과 만남을 갖는 것도 스트레스일 거다. 그의 우울증은 그가 사람들과 만나게 하는 자리를 차단하면서 근본적으로 스트레스 요인을 감소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처럼 증상은 몸과 마음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그 나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증상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일했는지를 알아준다면 증상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트라우마에 관해서도 비슷한 접근이 가능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트라우마틱했던 당시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작은 계기만으로도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문제의 그 기억은 시간적․공간적 맥락이 사라진 채 외상(外傷)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뇌의 변연계(邊緣系)에 속하는 ‘편도체’에 저장된 기억의 특징이다. 

 

이 기억을 언어적 기억 및 의식적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로 옮겨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기억의 시간적․공간적 맥락을 함께 저장하는 해마로 옮겨진 ‘기억’은 특정 사건에 대해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인지를 가능하게 한다. 권 박사가 “트라우마 포커스 테라피 치료 1~3회면 단일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가 없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사건 발생 자체는 바꿀 수 없지만 내 몸과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트라우마의 극복을 오롯이 개인에게 떠안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개인과 그를 둘러싼 사회집단이 공동으로 노력해야 극복할 수 있다. 특히 과거 유태인의 홀로코스트, 한국의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 재난은 사회적 노력이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회복에 주효하다.”

권 박사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요인으로 △사람들의 감정적 지지와 이해 △가해자에 대한 정당한 처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 등을 꼽았다. 이 같은 관점에서 봤을 때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다.

 

“미국의 911 테러는 명확하게 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집단이 있었다. 미국 사회는 피해자들과 한 편으로 똘똘 뭉쳤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언론 등에서 사건을 꾸준히 언급하며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반면 세월호는 일단 ‘적’이 누군지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특정할 수 있는 적이 없으니 유가족들은 미움을 표현할 수 없고 ‘한’을 분출할 수 없다. 심지어 피해자들에게 ‘정치적 색깔’이 덧씌워지기도 한다. 그 결과 피해자들은 외부와 고립돼 속앓이만 하게 되고 그 상처는 곪고 곪아 자식 세대까지 넘어가게 된다.”

권 박사는 이 같은 트라우마의 대물림을 ‘세대 간의 저주’라고 표현했다. ‘사회로부터 소외’를 경험한 부모 세대가 분출하는 잦은 분노와 이유 없는 다그침 때문에 자식 세대가 소외감을 이어받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경험의 대물림이다.

 


이런 악순환의 대물림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권 박사는 두 가지 차원에서 방법을 제시했다. 첫째는 사회적 차원이다. 유태인들이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만들고 관련 사건을 다룬 영화 등을 만들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 세계에 알려 지구적 이해를 고취시키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트라우마틱한 사건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는 개인적 차원이다. 자식 세대 스스로 부모 세대와 분리해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답습한 생활양식을 잠시 멈추고 ‘이것이 내가 원해서 하는 건지 부모에게 배운 것인지’ 분리하는 작업부터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쉬운 일은 아니라서 평소 이런 태도를 연습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쉬운 실천법은 심호흡이다. 어떤 문제 상황에 닥쳤을 때는 화를 내든 회피를 하든 뭔가 ‘액션’을 취하기 이전에 잠시 멈추고 심호흡을 하면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심호흡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 일상적으로도 깊고 느린 숨을 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심호흡을 통한 감정조절이 위험한 현대사회에서 나를 지킬 수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