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간 자체가 빅뉴스인 희귀본 《빈자의 미학》
  • 조철 문화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1.11 14:46
  • 호수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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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승효상, 20년 만에 복간 절판된 지 10년 넘은 지금 중고 서점서 10만원 호가하며 경매에도 등장

 

《빈자의 미학》의 저자 승효상 대표 © 김동율 제공

 

“60년대에 들어서 우리 강토에 휘몰아친 ‘잘 살아보세’라는 편향된 가치 추구가, 왜 잘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분별력 없는 구호가 되어 파행적 정치 모습인 군사독재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너도나도 졸부의 꿈을 이루려 염치도 버리고, 정서도 버리고, 문화도 버리고, 오늘날의 국적도 정체성도 없는 도시와 건축을 만들어내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뭉뚱그려진 전체 속에서 박제된 껍데기를 가지고 서로의 영역만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허무의 모습으로 이 시대를 지탱하고 있다. 이것은 이 시대의 위기이며 우리의 미래에 대한 위협이다.”

건축사무소 ‘이로재’의 승효상 대표가 《빈자의 미학》을 복간했다. 출판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복간 자체가 뉴스’라고 한다. 이 책은 건축서로는 드물게 1만5000부 이상 판매됐고, 절판된 지 10년이 넘은 지금 중고 서점에서 10만원을 호가하며 경매에도 등장한다. 책을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저자인 승 대표에게는 소장본이 한 권도 없는 희귀본이기도 하다. 초판을 발간했던 출판사에는 “찢어진 책이라도 구하고 싶다”는 문의도 이어졌다. 20년 전에 출간된 한 건축가의 128쪽짜리 작은 책이, 왜 이토록 긴 생명력과 큰 영향력을 지니는 것일까?

 

1996년, 대한민국은 ‘성장’과 ‘팽창’으로 내달리던 시기였다. 그런데 승효상 대표는 《빈자의 미학》을 통해 ‘비움’과 ‘절제’라는 시대를 앞선 화두를 ‘선언’했다. 그는 아파트 한 채 가져보는 게 평생의 꿈인 시대에 “적당히 불편하고 적절히 떨어져 있어 더 많이 걷고 나눌 수밖에 없는 건축이 좋은 집”이라고 말했다.

 

그런 승 대표의 건축 철학은 인문서를 고르는 독자들에게도 통했다. 《빈자의 미학》은 20여 년 동안 그가 일관되게 말하고 실천해 온 건축 철학의 밑그림이자 ‘삶의 선언’이다.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건축을 설명하기 위해 ‘미니멀리스트’(되도록 소수의 단순한 요소를 통해 최대 효과를 이루려는 사고방식을 지닌 예술가)를 끌어들인다. 

 

“미니멀리스트들은 대체로 그들의 드로잉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의미롭게 농축되어 있는지를 보이려 애쓴다. 그러나 그 농축된 의미는 다분히 개인 속에서만 닫혀 있다. 고도로 농축된 밀도의 정신세계를 최소한의 표현 속에 가두어버리는 그러한 미니멀리스트의 기계음은, 그것으로 한계 지울 수밖에 없는 장르에 갇힌다. 그러나 우리의 예술가 수화(樹話) 김환기가 그린 미니멀적 그림 속에는 아득한 옛 서정이 퍼져 있고, 이미 그것은 기계음의 한계를 극복해 있다.”

승 대표는 몬드리안의 작품이 한계를 가지는 반면 수화의 그림에는 작가가 찍은 무수한 점처럼 그 한계가 없음을 느꼈다. 그는 수화의 그림에서 현대건축이 봉착한 한계 또는 미로를 빠져나갈 탈출구를 발견했다. 그는 이를 두고 ‘빈자의 미학’이라 부르기로 했다.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

 

승효상 대표는 서울대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공과대학에서 공부했다. 15년간 공간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김수근 문하에서 일한 경험이 있고, 1989년 건축사무소 이로재를 개설했다. 파주출판도시의 코디네이터로 새로운 도시 건설을 지휘한 그에게 미국건축가협회는 2002년 ‘명예 펠로우’ 자격을 부여했다. 그해 건축가로는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로 선정돼 ‘건축가 승효상전’을 가지기도 했다. 그는 ‘비움’을 강조하는 건축가답게 편안한 삶을 위해 이것저것 더해 짓는 기능적 건축을 강하게 비판한다. 

 

“우리가 지난 몇 십 년간 교육받아온 ‘기능적’이라는 어휘는, 그 기능적 건축의 실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피폐화시켰는가. 편리함을 쫓아온 삶의 모습이 과연 실질적으로 편안한 것인가. 살갗을 접촉하기보다는 기계를 접촉하기를 원하고, 직접 보기보다는 스크린을 두고 보기를 원하고, 직접 듣기보다는 구멍을 통해 듣기를 원하는 그러한 ‘편안한’ 모습에서 삶은 왜 자꾸 왜소해지고 자폐적이 되어 가는가.”

승효상 지음 느린걸음 펴냄 128쪽 1만2000원


“反기능적 건축이 우릴 더욱 기능적이게 할 것”

 

그래서 승 대표는 ‘기능적’이라는 말을 다시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거에서 기능적이라는 단어는 우리 삶의 본질마저 위협할 수 있다. 적당히 불편하고 적절히 떨어져 있어 걸을 수밖에 없게 된 그런 집이 더욱 건강한 집이며, 소위 기능적 건축보다는 오히려 반기능적 건축이 우리로 하여금 결국은 더욱 기능적이게 할 것이다.”

 

승 대표는 딱히 쓸모없어 이름 짓기조차 어려운 공간에도 눈길을 준다. 기능적으로 필요한 공간만 있는 건축보다는 필요 없는 공간이 건축의 생명력을 길게 하며, 정해진 규율로 제시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공간, 예를 들어 우리네 ‘마당’은 참 좋은 예가 된다. 생활의 중심이나 관상의 상대일 뿐인 이방의 마당과는 달리, 우리의 마당은 생활뿐만 아니라 우리 사고의 중심이며,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를 발견케 하는 의식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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