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한령(限韓令)’에 긴장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 나원정 매거진M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1.30 14:12
  • 호수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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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그녀》, 한·중 합작 성공 발판 삼아 동남아·미주 등으로 세계 시장 확대

중국발(發) ‘한한령(限韓令·한류 금지령)’의 여파로 국내 엔터테인먼트업계가 크게 술렁였다. 중국 정부의 ‘한국 드라마와 영화·예능 방영 금지’ 가능성이 보도된 것이다. 그러나 ‘한류 금지령’에 대한 국내 영화계의 반응은 “좀 더 두고 보자”는 쪽에 가깝다.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의혹에 이번 사태까지 겹쳐 주가하락을 겪은 CJ E&M 관계자는 “아직 불안해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애써 표정관리를 하는 모습이다. “중국 시장은 더 장기적으로 내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시장 공략” 위해 CJ-JK필름 합병

 

불과 보름여 전인 11월8일, CJ E&M은 JK필름의 인수·합병을 발표했다. 투자·배급사와 영화제작사로 파트너십을 유지해 온 두 회사는 윤제균 감독의 ‘쌍천만 영화’ 《해운대》(2009)와 《국제시장》(2014)을 비롯해, 《히말라야》(2015) 등 꾸준히 히트작을 내왔다. 《내 깡패 같은 애인》(2010)을 제외하고 JK필름이 만든 모든 영화를 CJ E&M 산하의 영화사업부 CJ엔터테인먼트가 투자·배급했고, 그 과정에서 CJ E&M은 JK필름의 지분 15%를 확보했다. 이번 합병에서 오간 인수 대금은 150억원 규모. CJ E&M의 JK필름 지분율은 51%로 늘어났다. 인수·합병 후에도 양사가 인력 변동 없이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졌고, 오랫동안 협업해 온 관계이니만큼 별다른 마찰음은 없을 것으로 전망됐다. CJ E&M과 JK필름이 힘을 합친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원활한 해외 영화시장 공략”(CJ엔터테인먼트 윤인호 홍보팀장)이다. 그 취지에 들어맞는 프로젝트가 바로 중국 완다그룹 산하 완다픽처스가 투자하는 첫 한·중 합작 영화 《쿵푸로봇》이다. 완다는 중국 최대 영화사와 세계 최대 극장 체인을 소유한 글로벌 미디어 그룹이다.

 

국내에서 865만 명을 동원한 흥행작 《수상한 그녀》(2014) © CJ 엔터테인먼트


올해 6월12일 중국 상하이국제영화제에서 열린 ‘CJ E&M 한중합작 영화 라인업 발표회’에서 《쿵푸로봇》은 그 청사진을 첫 공개했다. 국내 4대 투자·배급사로 꼽히는 쇼박스·NEW·롯데엔터테인먼트 등도 한·중 합작 교류에 힘쓰고 있지만, 중국 현지에서 한·중 합작 영화 라인업을 발표한 건 CJ E&M이 처음이다. 2009년 중국 현지에 가장 먼저 진출해 한국영화 직배사를 세우고, 국내에서 865만 명을 동원한 흥행작 《수상한 그녀》(2014)와 동시에 기획·개발한 중국판 영화 《20세여 다시 한 번》(2014)으로 역대 한·중 합작 최고 흥행 기록(총 3억6400만 위안·약 664억원)을 세운 CJ E&M. 이들의 비결은 중국 관객이 재미있는 자국 영화로 느낄 만큼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었다. 이는 후발주자로 뛰어든 국내 다른 대형 투자·배급사들의 노선과 다르지 않다.

 

CJ E&M이 독보적인 건 중국 시장에서 쌓은 노하우를 동남아와 인도 등 아시아는 물론, 나아가 서구 시장까지 확장하고 있다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 CJ E&M의 한·중 합작 영화 사업의 목표는 한국과 중국에서의 흥행이 아니다. 다양한 역사적 경험과 아시아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양국 영화산업의 장점이 잘 결합하면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정태성 대표의 말이다. 이렇듯 중국 시장을 넘어서서 동남아와 미주 등으로 해외 시장을 확대하고자 하는 시도는 최근 ‘한한령’ 사태를 맞은 국내 엔터업계에도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그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앞서 언급한 《수상한 그녀》다. 직접 합작에 나선 중국판 《20세여 다시 한 번》이 성공한 뒤, CJ E&M은 베트남 버전 《내가 니 할매다》의 제작에 나섰다. 이 영화는 역대 베트남 자국 영화 흥행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 4월에는 일본, 11월엔 태국판이 현지 개봉했다. 모두 한국과 현지 합작 프로젝트로 성사됐다. 최근 JK필름을 인수·합병한 데 대해 CJ E&M 측은 “그간 중국·베트남 등 현지 제작사와 합작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전문 제작 인력과 노하우가 없어 어려움이 있었다”고 이유를 털어놓은 바 있다. 《수상한 그녀》의 합작 사례를 좀 더 들여다보면 그 속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황동혁 감독이 연출한 한국판 《수상한 그녀》는 의도치 않게 스무 살로 돌아간 70대 할머니 오두리(나문희·심은경)의 이야기다.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홀로 아들을 키우며 포기한 가수의 꿈을 되찾는 한편, 가족의 정을 재확인하는 휴먼드라마 장르를 표방한다. 이 영화가 아시아 각국에서 ‘꽃할매 열풍’을 일으키며 역대 한국영화 사상 가장 성공한 원소스멀티유즈 콘텐트가 될 수 있었던 건, 한국이 공동제작에 적극 참여해 철저한 현지화 공정을 거쳤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중 합작 영화의 전략과 겹쳐지는 대목이다.

 

《수상한 그녀》, 세계 최초 8개 언어로 제작

 

그런데 현지화 공정이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영화의 핵심적인 매력은 유지하되, 역사부터 가족적인 정서까지 세부 내용은 각 나라의 문화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11월19일 서울에서 열린 ‘유쾌한 한·중·일 무비토크-영화 《수상한 그녀》로 보는 한·중·일의 공통성과 다양성’ 좌담회에 참석한 중국판 연출자 레스티 첸 감독은 “우리 어머니가 처음부터 끝까지 본 유일한 작품일 정도로 공감을 일으킬 만했다”며 ‘이야기의 힘’을 강조했다. 동시에 그는 중국 사회와 문화에 맞게 변경한 지점들을 설명했다. 일례로 원작의 오두리가 흘러간 한국 가요를 불러 인기를 얻는다면, 중국에선 ‘대륙의 국민 가수’ 등려군의 노래를 활용하는 식이다. ‘싱글맘’이 많은 일본에선 원작의 모자 관계를 모녀 관계로 바꾸기도 했다.

 

《수상한 그녀》의 질주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인도네시아판에 이어 세계 최대 영화시장인 미국 본토 진출도 확정했다. 미국 제작사 ‘타일러 페리 스튜디오 34th 스트리트 필름’ ‘3pas 스튜디오’와 각각 손잡고 영어와 스페인 버전을 동시 제작한다. 둘 다 2018년 개봉을 목표로 현지에 최적화한 시나리오 개발과 감독 선정, 캐스팅을 진행할 계획이다. 이로써 《수상한 그녀》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베트남·일본·태국·인도네시아·영어·스페인 등 총 여덟 개 언어로 제작된 세계 최초의 영화가 됐다.

 

《수상한 그녀》의 성공에 힘입어, 동남아시아 합작영화 제작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올 하반기만 해도 지난 9월 한국과 베트남 합작 호러 영화 《하우스메이드》, 10월에는 인도네시아 인기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한국·인도네시아 합작 청춘영화 《차도 차도》, 12월엔 베트남에서 가장 사랑받는 액션과 슬랩스틱 코미디 장르를 겨냥한 한국·베트남 합작영화 《사이공 보디가드》 등이 잇달아 개봉한다. 한국과 동남아 현지 합작 영화가 성과를 거두면서 영화진흥위원회가 직접 베트남·인도네시아 등에서 한국과 현지 영화산업 활로를 넓히기 위한 양국 영화계 교류 행사를 여는 등 실질적인 노력에 나섰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아시아 시장을 더 넓게 보는 순간, 더 많은 기회가 열린다. 중국의 ‘한류 금지령’에 긴장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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