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즈’ 입소문 나면, 영화 홍보는 덩달아 된다
  • 나원정 매거진M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2.15 13:20
  • 호수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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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마케팅’ 전성시대 흐름, 영화계에서도 새로운 마케팅 트렌드로 이어져

‘덕후’의 성지 코믹콘(Comic Con)이 한국에 온다. 코믹콘은 영화부터 만화·게임·코스프레 등 현대 사회에 나온 거의 모든 서브컬처(sub culture) 콘텐츠를 총집합한 박람회다. 1970년 3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시작돼 지금은 미국 뉴욕과 일본·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열리고 있다. 규모와 화려함에서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건 본고장 샌디에이고에서 열리는 ‘코믹콘 인터내셔널’이다. 해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블록버스터 신작의 ‘떡밥’을 선보이고, 스타 아티스트가 팬들과 자연스레 어울린다. 수준급의 코스튬플레이에 나선 얼리어답터(early adopter)들이 새로운 게임과 만화·피규어 등 ‘신상(新商)’을 만나는 것도 이곳이다. 올해 8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가 예정된 ‘코믹콘 서울’에 대한 기대감이 벌써부터 치솟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으로 이는 코믹콘 같은 초대형 박람회의 흥행을 점쳐볼 만큼 서브컬처에 대한 인기와 수요가 증가했음을 방증한다.

 

 

‘키덜트 문화’에 중장년층 지갑 열려

 

국내 서브컬처 시장에 키덜트족이 대두된 것은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아이 같은 감성과 취향을 지닌 어른이란 뜻의 ‘키덜트’는 이전까지 영화 분야에서는 주로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규어를 모으거나 프라모델 조립을 즐기는 이들에 한정해 사용됐다. 하지만 요즘은 굳이 구분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다. 그만큼 키덜트 문화가 대중화됐다. 키덜트와 공통분모를 가지되 더 다양한 분야의 마니아층을 일컫는 ‘덕후’란 말도 예전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쓰인다. 특정한 무언가에 열광하는 팬덤 혹은 소비층이 점차 대중적으로 확대되고 두터워지고 있다는 얘기다.

 

유명 패스트푸드점이 시즌마다 어린이 세트와 함께 선보이는 장난감을 구하려고 출시 당일 새벽같이 줄을 서고, 이를 소셜네트워크에 ‘인증’하는 일쯤은 일종의 유행이자 놀이가 됐다. 이모티콘을 본뜬 아기자기한 캐릭터 상품들은 이제 10대들을 넘어 ‘직딩’들의 사무실 책상까지 진출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성별과 연령을 초월한 컬렉터들도 생겨났다.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한다.” 최근 심심찮게 들려오는 말이다. 어린 시절 장난감처럼 예쁘고 귀여운 무언가에서 한줌의 위안이나마 얻고 싶은 중장년층의 지갑이 열리면서 제품의 품목과 가격대도 다양해졌다. 이른바 ‘감성 마케팅’ 전성시대다. 이러한 흐름은 영화계에서도 새로운 마케팅 트렌드로 이어지고 있다.

 

영화 《아가씨》의 박찬욱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으로 구성한 화보집 《아가씨 가까이》와 정서경 각본가의 서문이 실린 시나리오북, 두 여주인공 버전을 각기 만든 OST 앨범 등은 불티나게 팔렸다. © CJ 엔터테인먼트

1월21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 예술영화관 아트나인에서 열린 윈터 플리마켓. 정오로 공지된 판매 개시 한 시간 전부터 인파가 몰려 문전성시를 이뤘다. 판매 품목은 다름 아닌 영화 ‘굿즈’들. 굿즈(Goods)란 원래 상품을 뜻한다. 그런데 최근엔 문화 분야 파생 제품을 일컫는 좁은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굿즈의 선두주자로 불리는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판촉물이 대표적이다. 인조가죽으로 만든 북 커버부터 책 모양의 쿠션과 냄비받침 등 아이디어에서 디자인까지 신선한 굿즈들은 최근 3년간 알라딘을 업계 3위에서 2위로 올려놨다. 굿즈만 수집하는 이들도 생겼다. “굿즈를 샀더니 책이 딸려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영화계에서도 굿즈는 전성시대를 맞았다. 대부분은 개봉 영화 홍보용이다. 누구든 마음에 든 영화의 포스터나 명장면이 담긴 엽서를 간직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나오는 굿즈들은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기발함과 완성도가 상상 그 이상이다. 문구류부터 퍼즐·배지·에코백·음료까지 영화 콘셉트에 맞춰 정한 품목과 디자인이 첫눈에 마음을 빼앗는다.

 

굿즈가 입소문이 나면, 영화 홍보는 덩달아 된다. 그래서 독립·예술 영화계에서 굿즈 제작이 ‘마케팅의 기본’이 됐다. 기존 광고에 비하면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차를 마시며 집필하기로 유명한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의 전기 영화 《트럼보》는 주인공 달튼 트럼보의 목욕 중인 상반신을 본뜬 종이 인형에 매달린 홍차 티백을 나눠 줬다. 이유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독립영화 《셔틀콕》은 영화 제작 과정을 스토리텔링한 미니북을, 음악 영화 《프랭크》는 가수인 주인공 프랭크가 극 중 절대 벗지 않았던 탈을 본뜬 가면을 선물했다. 《프랭크》의 경우, 관객들이 가면을 착용한 ‘셀카’를 소셜네트워크에 공유하는 것이 놀이처럼 유행하기도 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85년 시간여행 SF 《빽 투 더 퓨쳐》는 2015년 재개봉 당시 골수팬들의 취향을 저격했다. 주인공 마티가 브라운 박사에게 쓴 편지와 1987년 국내 개봉 당시의 전단지 복원판, 극 중 사건 해결을 알리는 신문 등으로 ‘메모리얼 키트’를 만든 것. 레슬링 선수를 둘러싼 실화를 그린 《폭스캐처》는 극 중 레슬링팀의 로고가 박힌 맨투맨 운동복을 배포해 중고 사이트에서 두고두고 거래 문의가 이어지기도 했다. 고시촌 살인사건을 그린 국내 블랙코미디 영화 《범죄의 여왕》은 고시학원 수강생들 사이의 인기 품목으로 영화에 등장한 ‘합격탕’ 패키지에 더치커피를 담아 ‘아이디어 굿즈’로 회자됐다.

 

 

굿즈 상품 대량구매 후 암거래에 나서기도

 

그러나 예쁜 굿즈보다 더 힘이 센 건 좋은 영화다. 굿즈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영화가 좋아야 굿즈도 인기를 끌 수 있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예가 토드 헤인즈 감독의 퀴어 멜로 영화 《캐롤》이다. 지난해 2월 국내 개봉한 이 영화는 레즈비언 로맨스라는 다소 낯선 소재에도 불구하고, 주연 배우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의 호소력 짙은 열연과 감성적인 연출로 30만 관객을 모으며 다양성 영화 흥행 3위에 올랐다. 흥미로운 건 이 30만 명이 웬만한 1000만 영화의 관객보다 영화에 대한 충성도와 수집 욕구가 훨씬 더 높은 ‘골수팬’이란 사실이다. 당시 《캐롤》 측은 핑크빛 노트와 금빛 북클립으로 구성된 굿즈를 만들어 나눠 줬는데, 수량이 모자랄 만큼 호응이 높았다. 《캐롤》은 포스터도 유난히 주목받았다. 디자인 업체 ‘피그말리온’이 작업한 7종의 포스터를 돈 주고 사겠다는 문의가 쇄도했다. 이에 힘입어 피그말리온은 아트나인을 비롯해 상상마당·CGV아트하우스 등 독립·예술영화관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에서 특별 제작한 《캐롤》 포스터와 엽서 세트를 선보였는데, 반응이 열광적이었다.

 

영화 속 등장인물의 감성을 중시하는 피그말리온의 디자인은 다른 영화들의 포스터에서도 여지없이 관객의 마음을 끌었다. 개봉 3개월째 여전히 관객 몰이 중인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와 두터운 팬덤을 거느린 20대 감독 자비에 돌란의 《단지 세상의 끝》 등이 그 예다. 특히 홍보 이벤트나 플리마켓에서만 만날 수 있는 피그말리온 특별 제작 포스터는 시중에 유통되는 공식 포스터와는 다른 이미지와 디자인을 담아 희소성 면에서도 컬렉터들의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지난 1월 아트나인 윈터 플리마켓에서 피그말리온의 영화 포스터·엽서 세트가 두 시간여 만에 매진사례를 이룬 적도 있다. 심지어 이날 행사장 밖에서는 피그말리온 제품을 대량 구매한 누군가가 매진으로 구하지 못한 이들을 대상으로 암거래에 나섰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왔다.

 

그러나 플리마켓 등에서 ‘판매’되는 굿즈는 극히 소량이다. 물론 이 역시 생산단가를 빼면 인건비도 남지 않는 싼 금액에 판매된다. 사실상 관객 서비스란 얘기다. 현재 영화 굿즈들은 대부분 홍보용으로 무료 배포가 원칙이다. 팬들의 구매 문의가 이어지지만, 공식적인 창구로 대량 판매에 나설 경우 영화사(외화의 경우 현지 본사)와의 별도 계약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 이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인 영화사는 거의 없다. 단, 지난해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예외였다.

 

한국영화로는 드물게 여성 퀴어 멜로를 표방한 이 영화는 수차례 재관람하는 관객들이 속출할 만큼 신드롬을 일으키며 컬트 반열에 올랐다. 팬사이트 ‘《아가씨》 갤러리’에서 활동하는 일명 ‘아갤러’들은 잡지사에 이 영화 관련 인터뷰·화보가 실린 잡지를 대량 주문해 별도 생산에 착수하게 할 만큼 조직적으로 구매력을 발휘했다. 박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으로 구성한 화보집 《아가씨 가까이》와 정서경 각본가의 서문이 실린 시나리오북, 두 여주인공 버전을 각기 만든 OST 앨범 등은 불티나게 팔렸다. 영화의 3시간3분여 최초 편집본이 담기는 블루레이는 제작 계획 단계부터 화제가 됐다.

 

키덜트족이 서브컬처 시장에서 위력을 발휘한 것만큼, 국내 영화계에 대두되고 있는 마니아, 일명 ‘덕후팬’들 역시 새로운 시장을 열고 있는 셈이다. 대중적으로 흥행하지 않은 영화여도 골수팬은 생긴다. 《무뢰한》을 좋아하는 관객들은 페이스북에 ‘무뢰한당’이란 페이지를 만들어 활동하며 오승욱 감독과 관객의 대화 현장에 현수막까지 내걸었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 《아수라》는 스스로를 극중 도시로 등장한 ‘안남시’ 시민이라 칭하는 일명 ‘아수리언’들이 등장했다. 이런 추세라면 최근 유난히 눈에 띄는 특정 영화의 골수팬들을 해당 영화 굿즈의 잠재적 컬렉터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만들어라, 그러면 수집되리라. 영화 굿즈 전성시대는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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