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졌지만, 오스카는 ‘그래도’ 하얗다
  • 나원정 매거진M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3.16 16:13
  • 호수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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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는 너무 하얗다’ 비판받는 아카데미상, 올해 흑인 영화 《문라이트》 작품상에도 아쉬움 남긴 이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89년 역사상 가장 쇼킹했다.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작품상 주인공이 《라라랜드》에서 《문라이트》로 번복된 것이다. 시상자였던 배우 티나 더너웨이와 워런 비티에게 작품상이 아닌 여우주연상(《라라랜드》의 엠마 스톤) 명단이 잘못 전달되면서 이 같은 실수가 벌어졌다. 작품상을 잘못 호명해 당황한 워런 비티 대신 마이크를 쥐고 《문라이트》 제작진을 무대로 불러 올린 것은 《라라랜드》의 프로듀서 조던 호로위츠였다.

 

 

‘백인 중심’ 아카데미 시상식이 달라졌다고?

 

《라라랜드》와 《문라이트》는 일찌감치 가장 유력한 수상 라이벌로 점쳐졌다. 앞서 열린 제74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각각 코미디·뮤지컬 부문(《라라랜드》)과 드라마 부문(《문라이트》) 작품상을 나란히 수상하는 등 여러 시상식에서 자웅을 겨룬 두 작품이었다. 그러나 엠마 스톤·라이언 고슬링이라는 할리우드 스타 배우들이 참여해 세계적인 흥행을 거둔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에 비해, 《문라이트》는 동성애자 흑인 소년의 고단한 성장담을 담은 독립영화다. 보수적인 분위기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은 《라라랜드》가 가져갈 것이라는 추측이 우세했다.

 

극적으로 트로피를 거머쥔 《문라이트》의 배리 젠킨스 감독은 “꿈도 못 꿨다”며 흥분했다. 프로듀서를 맡은 아델 로만스키는 “TV로 이 광경을 보고 있을 유색인종 아이들에게 작게나마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며 감격했다. 흑인 감독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쥔 건 스티브 매퀸 감독의 《노예 12년》(2013)에 이어 두 번째다. 젠킨스 감독이 각색상을, 마허샬레 알리가 남우조연상을 챙겨가며 이날 《문라이트》는 총 3관왕에 올랐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문라이트》로 작품상을 수상한 터렐 앨빈 매크레이니 작가(왼쪽)와 배리 젠킨스 감독 © AP연합

역시 흑인 배우 비올라 데이비스가 덴젤 워싱턴의 감독작 《펜스》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지난해 2년 연속 단 한 명의 흑인 배우도 후보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으며 ‘백인 중심주의’ 논란에 휩싸였던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해 올해 “달라졌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온 이유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일례로 아카데미 감독상 부문에선 89년째 흑인 수상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올해 《문라이트》의 젠킨스 감독이 이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트로피를 가져간 것은 《라라랜드》의 다미엔 차젤레 감독이었다. 받을 만한 흑인 감독이 없어서라거나, 운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올해 시상식에서 흑인 감독 최초로 작품상과 감독상·각색상 3개 부문 후보에 동시에 올랐던 젠킨스 감독은 소감을 묻는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최초가 아니었다면 더 기뻤을 것이다. 스파이크 리처럼 훌륭한 감독이 한 번도 이 세 부문 후보에 동시에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역사상 최초로 아카데미상 시상대에 오른 흑인은 1940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푸근한 유모 역으로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해티 맥다니엘이다. 당시 제12회 시상식이 열렸던 앰배서더 호텔은 흑인 출입이 금지돼 있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프로듀서 데이비드 O 셀즈닉의 특별 요청으로, 맥다니엘은 무사히 시상식에 참석했다. 그날 트로피를 쥔 이 배우는 수상소감 내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 봉화(아카데미 트로피)를 먼 미래에나 밝힐 수 있을 줄 알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과 영화라는 축복에 경외를 표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후 80년 넘는 세월 동안 아카데미 트로피를 가져간 흑인 배우·감독·뮤지션·작가·프로듀서 등은 30명 정도다.

 

제74회(2002년) 시상식에는 또 다른 기념비적인 ‘사건’도 있었다. 덴젤 워싱턴과 할 베리가 각각 《트레이닝 데이》와 《몬스터 볼》로 나란히 아카데미 남녀 주연상을 거머쥐며 2명 이상의 흑인 배우가 같은 해 연기상을 차지하는 사상 첫 진풍경을 자아낸 것이다. 흑인 배우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최초의 해였다. 4년 전 《노예 12년》이 아카데미 최초 작품상을 받은 이후 세간의 관심은 누가 흑인 최초 감독상을 거머쥘지에 쏠렸다. 지난 89년간 흑인 영화인들이 닦아놓은 길을 되밟는 데 그쳤던 올해 수상 결과가 다소 아쉽게 여겨진 까닭이다.

 

그러나 다양성 확보를 위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이 기울인 노력은 어떤 변화의 시작으로서 인정할 만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Oscars So White)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질 만큼 격렬한 비판에 직면한 아카데미 주최 측은 시상식 후보 선발에 참여하는 회원단을 크게 확충했다.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셰릴 분 아이삭 회장의 주도로, 59개국 683명의 영화 전문가가 새롭게 아카데미 회원에 호명됐다. 그중 46%가 여성, 41%는 유색인종이다. 다양성 확보를 의식한 것.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례적으로 주요 부문마다 유색인종 후보가 한 명 이상씩 포함됐던 것은 이러한 움직임이 거둔 성과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문라이트》의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다양성 확보 위한 변화의 첫걸음 뗀 아카데미

 

특히 작품상 부문 후보군은 인상적이다. 모두 9편의 영화가 호명됐는데, 수상작 《문라이트》를 비롯해 NASA 프로젝트에 감춰진 천재적인 흑인 여성들의 실화를 다룬 《히든 피겨스》, 어릴 적 생이별한 부모를 찾아 나선 인도 청년의 로드무비 《라이언》, 그리고 《펜스》 등 그 절반에 가까운 4편이 유색인종 주인공을 내세웠다. 유색인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작품상 후보에 한두 편 끼는 게 고작이었던 예년에 비하면 적잖은 변화다.

 

“흑인이고, 가난했고, 오랫동안 마약 중독으로 고생한 어머니를 뒀기 때문에 훌륭한 감독은 못 될 것이라고 좌절한 시기가 있었다”는 젊은 흑인 감독(배리 젠킨스)이 작품상 트로피를 거머쥐고, “나는 그냥 배우이지, ‘흑인 배우’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 무슬림 배우(마허샬레 알리)가 남우조연상에 빛났던 올해다. 이제, 흑인의 수상은 최초의 기록을 깨는 엄청난 것이라기보다 당연한 결과가 되어가고 있다. 더 다양한 국적·인종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를 채우고 있는 현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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