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보고, 두 번 봐도, 자꾸만 보고 싶은 《아가씨》
  • 나원정 매거진M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3.31 11:16
  • 호수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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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 새로운 트렌드 떠오른 ‘N차 관람’, 《아가씨》 111차례 본 관객도

 

“내가 만난 한국 관객 중에는 《너의 이름은.》을 50번 본 분도 있었다.” 신작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으로 지난 2월 내한한 일본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얘기다. 꿈을 꿀 때마다 서로 몸이 뒤바뀌는 도시 소년과 시골 소녀의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350만 관객을 모으며 역대 국내 개봉한 일본 영화 가운데 최고 히트작으로 등극했다. 1월4일 개봉에 맞춰 한 차례 내한했던 마코토 감독은 흥행 열기에 힘입어 다음 달 다시 한국을 찾았다. 2월9일 무대인사를 통해 열혈 관객들을 만난 그는 “이날 찾아준 분들 중 90% 이상이 《너의 이름은.》을 세 번 넘게 봤고, 열 번 이상 본 분도 꽤 있더라”며 벅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3월23일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의 CGV영등포 매표소 © 시사저널 박정훈

 

하루에만 영화 9편 몰아보기도

 

《너의 이름은.》은 극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극 중 대사와 노래를 소리 내어 따라 하며 관람하는 ‘혼모노(ほんもの)족’이 유난히 속출해 더욱 화제가 된 영화다. 혼모노란 주위에 피해를 주면서 ‘덕질’하는 일부 오타쿠를 뜻하는 말. 최근 극장가에선 다른 관객에게 민폐를 끼치는 이들 중 일부를 일컫는 말로 자주 쓰인다. 결국 영화사 측에서 주제가를 부르며 관람할 수 있는 합창 상영 시간을 따로 마련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의 재관람 열풍은 이 영화에만 국한된 현상으로 단정 짓기 어렵다. 영화 몰아보기, 이른바 ‘N차 관람’이 최근 국내 극장가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최대 극장 체인 브랜드 CJ CGV가 지난 2월8일 ‘2017년 상반기 CGV 영화산업 미디어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날 CGV 리서치센터는 최근 새로운 유형의 극장 관객이 급증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N차 관람이다. CGV 영화티켓 발권 수치를 기준으로, 지난해 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최다 관람한 관객은 박찬욱 감독의 여성 퀴어 스릴러 《아가씨》를 무려 111차례나 관람한 서울 거주의 한 30대 여성이었다. 경기도에 사는 또 다른 20대 여성은 이 영화를 77회 관람했다. 전산상의 오류 아니냐고? 그런 의문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아가씨》 팬들이 만든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 N차 관객들의 ‘인증사진’이 올라온다. 재관람 횟수만큼 두둑해진 《아가씨》 영화티켓 뭉치를 사진으로 찍어 영화에 대한 남다른 충성도를 내보이는 것이다.

 

한 영화를 3회 이상 재관람한 CGV 관객들을 대상으로 집계했을 때, 이러한 N차 관객이 가장 많이 본 영화는 나홍진 감독의 호러 스릴러 《곡성》으로 평균 재관람 횟수가 4.2회에 달했다. 이어 《럭키》 4.1회, 《닥터 스트레인지》 3.7회, 《인천상륙작전》 3.6회 순이었다. 이승원 CGV 리서치센터 팀장은 “기다렸던 영화를 N차 관람하는 현상이 보편화되고 있다”고 했다.

 

하루에 여러 편의 영화를 몰아보는 관객도 늘어나고 있다. CGV에 따르면, 지난해 극장에서 영화를 하루 2회 이상 관람한 관객 수는 50만 명에 육박했다. 3회 이상 관람한 관객도 5만8000명이다. 대구에서는 하루 최대 9편 이상의 영화를 몰아보는 관객도 있었다. 이러한 관객들의 하루 평균 관람 횟수는 무려 3.52회에 달했다. 지난해 2월, 하루 9편의 영화를 본 관객의 관람 스케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침 일찍 위안부 실화를 토대로 한 화제작 《귀향》으로 관람을 시작한 그는 전도연·공유 주연 멜로 《남과 여》와 재개봉 영화 《쇼생크 탈출》, 그리고 ‘2016 아카데미 기획전’에서 상영된 여성 퀴어 멜로 《캐롤》을 두 번, 이어 《대니쉬 걸》 《사울의 아들》 《스포트라이트》 《트럼보》 등 주로 다양성 영화를 중심으로 9편을 감상했다.

 

《너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2월10일 서울 강남구 임피리얼팰리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객의 변화가 영화 산업의 변화 이끌어

 

올해 2월 메가박스에서 하루 6편을 몰아본 관객의 경우도 비슷하다. 메가박스에 따르면, 그는 이날 하루 동안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수상작 《단지 세상의 끝》과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쥔 미국 독립영화 《문라이트》를 비롯해 《23 아이덴티티》 《재심》 《그레이트 월》 《라빠르망》 등을 봤다. 상업영화보다 다양성 영화를 더 많이 챙겨본 것. 같은 영화를 N차 관람하는 관객들은 2D·3D·아이맥스·4DX·돌비 애트모스 등 영상과 사운드 퀄리티가 다른 상영관들을 찾아 같은 영화를 다양한 포맷으로 관람하는 양상도 엿보였다.

 

N차 관람을 잇는 또 다른 극장가 트렌드는 ‘혼영족’의 급증이다. 혼영족이란 혼자 영화를 보는 관객을 뜻한다. 지난해 CGV 전체 관객 중 13.3%가 혼영족이었다. 2014년 9.2%, 2015년 10.7%였던 것을 감안하면 가파른 증가 추세다. 나홀로 관람의 이유를 묻는 설문에서는 57.4%가 ‘영화에 집중할 수 있어서’라고 답했다.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것이 귀찮아서’라는 이가 20.3%, ‘동행인을 찾는 것이 귀찮다’는 답변이 13.1%였다. 몰아보기 관람 증가와 함께 혼영족 역시 향후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세대별 관객 중 중장년층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는 현상도 주목된다. 여전히 극장 관객의 주축은 20~30대다. 그러나 CGV 집계 기준 전체 관객 대비, 45세 이상 관객의 비율이 2007년 5.3%에서 2012년 12.3%, 지난해 20.3%로 꾸준히 늘고 있다. 특히 《명량》과 《부산행》 등은 45세 이상 관객 비율이 21%에 다다르며, 1000만 관객을 넘어서는 원동력이 됐다. 2010년대 들어 《7번방의 선물》 《명량》 《국제시장》 등 중장년층을 아우르는 소재와 주제의 영화가 각광받은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제리 맥과이어》 《비포 선라이즈》 《패왕별희》 등 왕년의 히트작이 잇달아 재개봉해 호응을 얻는 것도 같은 이유로 볼 수 있다.

 

초등학생 이하 자녀를 둔 35~44세 부모 관객층도 2012년 규모 대비 지난해 41% 가까이 성장했다. 지난해 아이를 둔 가족 관객은 CGV 전체 관객의 10.5%였다. 또 이들이 한 번 극장 나들이를 할 때 구매하는 평균 영화티켓 수는 2.8장이었다. 한 명의 관객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영화 업계는 이 새로운 관객층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2030세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기존 마케팅 공식이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는 몰아보기, N차 관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다양성 영화계의 대응이 발 빠르다. SNS 등을 통해 기존 관객의 재관람을 유도하는 홍보 전략을 펼친 《너의 이름은.》 《문라이트》 등이 그 예다. 관객의 변화가 영화 산업의 변화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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