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세월호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진도·목포=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7.04.04 14:04
  • 호수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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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마를 틈 없는 팽목항 현장 취재…정부의 미숙한 대응 ‘여전’

 

“눈물을 머금고 호소합니다…아이들을 살릴 수 있게 도와주세요.”

세월호 참사 3일이 지난 2014년 4월18일, 구조 소식을 기다리던 실종자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전남 진도체육관에 가득 울려 퍼졌다. 이들은 며칠째 실종자 수 집계조차 우왕좌왕하는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며 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도와 달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참사 3주기를 앞둔 3월29일, 가족들은 다시 차가운 팽목항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날 오후 1시30분 팽목항을 찾은 선체조사위원회 위원들과 5시간에 걸친 면담을 마친 직후였다. 미수습자 조은화양 어머니 이금희씨는 “정부·조사위 다 못 믿는다. 내가 내 손으로 흙 파서 내 자식 찾겠다”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검토하겠다’ ‘논의하겠다’란 말만 3년째다. 이제 제발 애들 좀 찾게 해 달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9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국민 여러분께서 도와주길 바란다”며 수십 대의 카메라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연신 땅을 향해 고개 숙였다.

 

물속에 잠겨 있던 세월호가 떠올랐고 기다리던 수색작업도 4월10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여전히 미숙한 정부 대응으로 가족들은 지금도 눈물 마를 틈이 없다. 정부를 믿지 못해 국민에게 호소하는 가족들의 모습 역시 3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3월28일 세월호 선체 부근에서 발견된 유해를 확인하기 위해 미수습자 가족들과 국과수 직원들이 사고 해역으로 향할 배에 오르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3월29일 팽목항을 방문한 선체조사위원회 위원들과의 합의가 불발된 후 미수습자 가족들이 “9명의 미수습자를 찾게 국민들이 도와 달라”며 절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천당과 지옥 하루에 몇 번 오가는지…”

 

3월26일 세월호 선체가 완전히 인양된 후에도 가족들의 감정은 파도처럼 쉼 없이 오르내렸다. 이날 가족들은 사고 해역으로 향했다. 인양된 세월호 모습을 처음으로 눈앞에서 봤다. 처참한 선체 상태에 애통해했지만 예상보다 빨리 수색작업을 시작하겠다는 해수부 발표에 한차례 마음을 쓸어내렸다.

 

이후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팽목항은 3월28일 오후 3시30분 세월호 선체 외부인 반잠수선 갑판에서 유해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급격히 분주해졌다. 유해를 확인하기 위해 함께 사고 해역으로 나갈 광주 국과수 직원들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 동안 가족들의 표정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미수습자 허다윤양 아버지 허흥환씨는 “서 있어도 불안하고 앉아 있어도 불안하다”며 가족 휴게실 앞마당을 한참 서성였다. 양승진 단원고 교사의 아내 유백형씨는 기자와 남편 이야기를 나누며 초조한 시간을 달랬다. 유씨는 마당 뒤편에 묶여 있는 진돗개 한 쌍을 보면서 “수놈이 암놈 뒤만 졸졸 쫓아다닌다. 우리 남편 같다”고 말하며 웃음 지었다.

 

해가 저문 저녁 7시 배에 올라타 사고 해역으로 향하던 가족들에게 “발견된 유해가 동물 뼈로 추정된다”는 소식이 전달됐다. 어두운 밤이 돼서야 바다에서 돌아온 가족들은 좋아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현장에서 가족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양한웅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집행위원장은 “가족들이 오늘 하루만 해도 천당과 지옥을 몇 번씩 오갔다”며 “해수부가 동물 뼈 해프닝으로 막판 ‘홈런’을 쳤다”고 비판했다.

 

다음 날 아침, 늦게까지 잠을 설쳤지만 가족들에게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엔 내내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미수습자 가족의 국가배상금 신청 기간을 3년으로 연장하는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법사위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이제 우리 자식 찾는 것만 신경 쓰면 돼”라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조은화양 어머니 이금희씨는 전날 동물 뼈 소동에 대해 “다리가 후들거리고 간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듯했다”고 밝히면서도 “발견된 게 미수습자 유해였으면 이후 계획에 여러모로 차질이 생겼을 텐데 한편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잘될 거다”며 웃어 보였다. 선체조사위원회의 오후 방문을 기다리면서도 가족들은 “전과는 좀 다르지 않겠느냐”며 기대를 내비쳤다.

 

그러나 기대와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위원들과 가족들이 들어간 면담장에선 이내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성이 새어나왔다. 향후 미수습자 수색과 진상조사와 관련해 가족들이 제시한 합의사항 일부를 위원들이 거부하자, 꾹꾹 눌러온 가족들 울분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다.

 

미수습자 허다윤양 어머니 박은미씨는 크게 오열한 나머지 면담 후 자원봉사자에게 업혀 나오기도 했다. 3년 내내 가족 곁을 지킨 양한웅 위원장은 “3년 동안 이렇게 흥분한 모습 처음 봤다”며 안타까워했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면담장의 모습은 “당신들은 아들딸도 없느냐”며 통곡하며 바닥을 구르는 가족들과 그 앞에 나란히 앉아 침묵만 지키는 위원들의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3월31일 오전 5시 미수습자 가족들이 목포 신항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기 전 팽목항 분향소에 들러 미수습자 9명의 위패를 챙기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3월31일 팽목항 인근 서망항에서 미수습자 가족 일부를 태우고 출발한 배가 목포 신항으로 향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가족들을 배제하지 말아 달라”

 

가족들은 향후 수색 방식에 대해 함께 ‘합의’하자는 요구를 위원들이 “‘협의’로 고치자”고 말한 지점에서 가장 크게 분노했다. ‘합의’는 현행 세월호특별법과 조사위원 권한 밖의 일이라는 것이다. 양승진 단원고 교사 아내 유백형씨는 “무슨 얘기만 하면 ‘법, 법’.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냐”며 분통해했다.

 

세월호 희생자 진윤희양 삼촌이자 참사 당일부터 1080일째 팽목항을 지킨 자원봉사자 김성훈씨는 유족들의 분노는 단순히 단어 하나, 표현 하나 때문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정부가 제대로 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나와 얼마나 가족들을 애타게 했느냐”면서 “누구 하나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사람 없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가족들은 법을 무시하고 맘대로 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냥 더 이상 이 일에서 가족들을 배제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의 눈에도 가족들을 대하는 정부 태도는 3년 전과 전혀 달라진 바 없이 비춰졌다.

 

가족들은 2014년 9월30일 세월호특별법이 통과될 때부터 미수습자 가족들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족들과 사전에 어떠한 논의도 하지 않았고 미수습자 수색보다 진상조사를 우선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때의 기억이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아 가족들은 이번 조사에 앞서 선체조사위로부터 보다 확실히 약속을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조사위와의 합의가 파행된 후 조은화양 어머니 이금희씨는 “우리만큼 진상조사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 없다. 다만 사람 먼저 찾자는 거다”며 눈물지었다. 허다윤양 아버지 허흥환씨 역시 “이곳 멀리 팽목항에 있는 우리 미수습자 가족 목소리는 안 들리나보다. 우리가 9명, ‘소수’라서 그런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3년을 보낸 팽목항이 마치 “9명의 가족만이 따로 머무는 ‘철창 없는 감옥’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세월호를 실은 반잠수식 선박인 화이트마린호가 3월31일 오후 목포 신항에 접안할 때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 목포=사진공동취재단


목포 신항에서 다시 기다림의 여정

 

세월호가 목포 신항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 가족들은 조용히 팽목항과의 이별을 준비했다. 봉사자 김성훈씨도 3년 만에 짐을 쌌다. 3년의 짐은 자동차 트렁크를 가득 채우지도 못할 만큼 단출했다. 김씨는 미리 목포 신항 근처에 마련해 둔 거처에 머물며 가족들 곁을 계속 지킬 계획이다. 지난해부터 내려와 가족의 매끼 식사를 챙겨온 ‘팽목항 요리사’ 김명봉씨는 이날도 여느 때와 같이 30인분에 달하는 식사를 묵묵히 준비했다. 그는 “여기 와 있는지 부모님이 모르신다”며 식사 준비 틈틈이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팽목항에서의 마지막 밤인 지난 3월31일 새벽, 가족들이 머무는 임시 주택엔 일찍 불이 켜졌다. 이들은 세월호가 목포 신항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함께 항해하기 위해 오전 5시 배에 올라탔다. 가족들은 수만 명 추모객 발길이 오갔던 팽목항 분향소에 마지막으로 들러 9명 미수습자들의 위패를 하나하나 챙겨 담았다. 9명은 가족과 목포 신항까지 함께했다. 1080일 만에 가족이 떠난 팽목항엔 한층 더 깊은 적막이 흘렀다. 취재진을 태우고 팽목항을 빠져나온 택시 기사는 “시원섭섭한데, 이상하게 섭섭함이 더 크네”라고 말했다.

 

2014년 4월16일 바다로 나선 세월호는 1080일 만인 3월31일 오후 1시쯤 마침내 육지와 맞닿았다. 수학여행을 떠난 325명의 단원고 학생과 14명의 교사, 그리고 104명의 일반승객을 가득 실었던 배는 녹슨 선체가 돼 제주항이 아닌 목포 신항으로 그렇게 실려 들어왔다.

 

미수습자 가족과 경기 안산 등에서 내려온 유가족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배를 마주했다. 이들은 수색작업과 진상조사를 진행할 선체조사위의 활동기간에 따라 최장 10개월 동안 목포에서 다시 기다림의 여정을 시작한다.

 

가족들은 “우린 기다림에 익숙하다”고 습관처럼 말한다. 긴 기다림의 끝에 반드시 가족과의 만남이 있으리라 믿기에 까마득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이들은 세월호가 인양된 날부터 기대감으로 4월17일·18일, 멈췄던 날짜를 다시 세기 시작했다. 3년 만에 풀린 이들의 시간이 또 한 번 멈추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세상 어디에도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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