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마저 ‘차단’ 당한 류샤오보
  • 김회권 기자 (khg@sisajournal.com)
  • 승인 2017.07.1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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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개혁 세력의 역량은 상당히 약화될 것이다”는 지적 제기돼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세상을 등졌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복역 중인 인권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61)가 7월13일 중국의대 부속 제1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11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는데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6월에 가석방됐다. 그는 해외에서 치료받기를 원했다. G20 정상회의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류샤오보가 독일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부탁했지만 실현되진 못했다. 

 

1955년 12월 길림성 장춘에서 태어난 류샤오보는 10대 시절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가족과 함께 외딴 시골에서 보냈다. 그는 1982년 길림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베이징 사범대학에서 문학 석사와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노르웨이와 미국 등에서 객원 연구원을 지냈다. 

 

7월13일 중국의대 부속 제1병원에서 사망한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인권운동가 류샤오보 ⓒ 사진=연합뉴스


 

류샤오보는 1988년 약 3개월간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 초빙돼 강의를 했다. 아사히신문은 그가 오슬로대 강의에서 “문학은 공산당 독재에 대항하기 위한 도구로 없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노르웨이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콜롬비아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있던 때인 1989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는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류샤오보는 귀국 운동에 참여해 베이징에서 단식 투쟁을 이끌었다. 

 

1989년 6월, 인민해방군이 무력으로 시위대를 탄압한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주요인사 3명과 함께 학생들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군과 협상에 나섰고 피해자의 확대를 막았다. 이후 ‘사군자’로 불린 4명 중 하나가 된 류샤오보는 대중을 선동한 혐의로 구속됐고 ‘'반혁명죄’로 1년7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대표적 본보기...사회와 차단당한 인권운동가

 

천안문에서 민주화를 호소했던 활동가들의 대부분은 이후 해외로 망명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에 남기로 했다. 중국 정부는 류샤오보를 감시했고 활동을 제한했지만 구속과 석방이 반복되는 삶을 거치면서도 그는 중국 정부와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계속 제기했다. 천안문 사건 피해자의 명예 회복 운동도 함께 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생각하고 있는 점은 현재 세계 모든 대국 가운데 중국만 여전히 권위주의 정치 상황에 놓여 있고 그것을 통해 끊임없는 인권 침해와 사회적 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 국면을 반드시 바꿔야 한다. 정치 민주화는 더 이상 지연할 수 없다.’ - 08 헌장 中 - 

 

베이징 올림픽이 열렸던 2008년 12월, 류샤오보는 ‘세계인권선언’ 60주년에 맞춰 중국의 민주화를 호소하는 ‘08 헌장’을 발표했다. 중국 공산당의 일당 독재의 포기와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 등을 호소했는데 이 헌장은 그에게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감옥행이다. 2009년 국가전복선동죄로 1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수감됐다. 하지만 2010년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면서 류샤오보는 1962년 노벨평화상이 제정된 이후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4명 중 한 사람이 됐다. 

 

류샤오보는 ‘08 헌장’을 통해 기본적 인권의 존중을 요구했다. 이 헌장에는 수천 명의 중국인이 함께 서명했다. 그는 폭력적인 폭도가 아니었다. 인터넷이 민주주의를 위한 공론장이 될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08 헌장’을 온라인으로 공개했다. 평화적인 그의 투쟁에 중국 정부는 ‘국가 전복을 선동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가 공산당이 갖는 거대한 권력에 도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는 본보기였다. 류샤오보를 통해 비슷한 의견을 표명하는 행동을 저지할 수 있다고 믿는 중국 공산당의 판단으로 그는 또 다시 사회와 차단됐다.

 

류샤오보는 중국 안팎의 민주 운동가와 인권변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중국 정치 체제에 녹아있는 일부 개혁파 지식인 사이에서도 지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외신들은 “올 가을 5년 만에 열리는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19차 당대회)를 앞둔 시진핑 지도부도 류샤오보의 죽음이 어떤 형태로 확산될 지 고민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주요 외신들은 류샤오보의 사망 소식을 중요 뉴스로 다루고 있지만 막상 중국 내에서는 그의 사망에 침묵하고 있다. ⓒ 사진=인터넷 홈페이지 캡처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운 중국 정부의 대책은 역시 ‘차단’이다. 혹시나 모를 체제 불만의 불씨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BBC는 인민일보 등 중국의 관영매체는 류샤오보 사망과 관련, 일제히 침묵하고 있다고 전했다. NHK는 자사의 류샤오보 관련 소식을 중국에서 인터넷으로 연결하면 검은 색 화면이 나올 뿐이라고 보도했다.


“류샤오보 존재 자체를 모르는 젊은이들 적지 않다”

 

2020년 형기가 만료된 이후 그는 다시 민주화 운동에 몸을 던지려고 했다. 출소한 뒤 해외 망명 대신 국내에서 자신의 역량을 다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국 내 개혁 세력은 그 정신적 지도자를 잃은 모양새다. 그가 감옥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향력은 상당했지만 생을 다한 지금은 달라졌다. 2008년 유럽의회가 주는 인권상인 ‘사하로프상’을 받은 인권운동가 후자(胡佳, 43)는 “류샤오보가 중국이 민주화로 가는 길에서 쓰러졌다. 우리의 역량은 상당히 약화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진핑 지도부가 들어선 2012년 가을 이후를 봐도 중국 내 인권운동가들의 상황은 그 이전 지도부와 다를 바 없었다. 언론과 정치 활동은 억압받았고 수많은 인권 변호사들은 투옥됐다. 대외적으로 ‘굴기’ 전략을 펼치며 국제사회에서 G2 위상을 구축한 시진핑 시대지만 국내 인권은 거꾸로 갔다. 1989년 6월의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 공산당은 애국주의 교육을 강화했고 서방의 지적을 간섭으로 일축해 왔다. 이런 중국 정부의 ‘차단’은 효과를 보고 있는데 “류샤오보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그의 사망을 모르는 중국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고 BBC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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