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는 비난 받을 영화가 아니다
  • 권상집 동국대 경영학부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0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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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집 교수의 시사유감] 영화 《군함도》에 대한 비난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을 일본

 

올해 초부터 영화 《군함도》에 대한 영화 업계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지난해 6월, 중국 상하이 중화예술궁에서 진행된 ‘CJ E&M 한중 합작영화 라인업 발표회’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은 부분은 일본의 군함도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탈출을 그린 《군함도》가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 개봉을 추진한다는 점이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동 시대의 고통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던 대한민국과 중국이 영화를 통해 일본에게 자성(自省)을 촉구한다는 메시지는 영화 《군함도》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높이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영화계에서는 《군함도》가 《명량》이 기록한 1761만 관객 동원 기록을 넘어설 것이라는 예측을 조심스럽게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뚜껑을 연 《군함도》는 지금 뜻하지 않은 논란에 직면해 있다.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더 많은 관객들에게 우리가 그 동안 알지 못했던 군함도라는 역사적 아픔을 일깨우고 친일 청산 또는 극복 의지를 강력히 내세웠던 류승완 감독의 의도는 이내 사라지고 국내와 일본에서 동시에 비난을 받는 어정쩡한 포지션에 영화가 놓여 있다. 하루 평균 100만명에 육박하는 관객들이 영화 《군함도》를 관람하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대중의 비난 수위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역사적 팩트를 왜곡한 반일 작품이라고 비난하고 있고, 국내 역시 친일영화, 식민사관, 역사왜곡 영화라며 해당 영화와 함께 영화를 만든 감독, 심지어 주연들까지 비난을 받고 있다.

 

영화 《군함도》의 장면들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군함도》에 대한 비판은 크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영화적 완성도가 미흡하다는 점. 둘째, 대규모 스크린 독과점을 통해 영화계 독점의 폐해를 또 다시 드러낸 점. 셋째, 역사왜곡 등으로 영화가 일제의 만행과 군함도의 진실을 전혀 알리지 못했다는 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영화적 완성도는 보는 사람에 따라 시나리오의 개연성, 역사적 고증 여부, 보는 즐거움 등 평가 기준과 잣대가 서로 다르기에 일단 논외로 하자. 관객이나 평론가들이 갖고 있는 기대가 워낙 컸기에 영화적 완성도가 기대 대비 다소 미흡한 건 솔직히 아쉬운 부분이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도 마찬가지다. 스크린 독과점에 대한 비난을 류승완 감독과 주연 배우들에게 쏟아내는 건 문제가 있다. 스크린 독과점으로 친다면, 지난해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2년 전 개봉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도 만만치 않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정작 2년 전 개봉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국내에서 촬영을 했다는 이유로 언론에서는 개봉 당일부터 매일 관객이 몇 만 명에 이르렀는지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텐트폴(투자배급사의 영화개봉 라인업 중 가장 흥행 가능성이 높은 영화) 작품이 개봉될 때마다 스크린을 과다하게 독점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으니 이는 영화업계가 머리를 싸매고 혜안을 모색해야 할 문제이지, 결코 이 비난을 “너희 때문이야”라고 감독과 배우들에게 돌리는 건 온당치 못한 처사이다.

 

《군함도》가 문화콘텐츠 영역에서 한발 더 나아가 현재 시사의 영역으로 넘어온 건 역사왜곡과 식민사관, 친일영화라는 프레임과 함께 일본에서도 반일영화라는 반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적 완성도의 미흡과 함께 친일영화라는 논란에 휩싸인 작품은 2011년 12월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라는 작품이 또 하나 있다. 강제규 감독은 영화 《마이웨이》가 일본을 미화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희생자, 일본은 가해자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미래에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가해자, 피해자를 넘어 모두가 미움의 상처를 보듬어 안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고 언급해 더 많은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강제규 감독이 당시 대중으로부터 비난 받은 이유는 딱 한가지다.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원수처럼 지내던 이들이 사선을 넘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고 이러한 방향이 미래지향적이라고 판단한 그의 그릇된 역사 인식 때문이다. 지금도 유럽에서는 독일에 대해 역사적 사죄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고 나치에 부역한 자들을 나이, 성별, 지위를 막론하고 단죄(斷罪)하고 있다. 독일에서도 나치는 금기어로 통하고 모든 유럽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표명한 후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와 함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도 역사적 책임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는 국가 또는 민족과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런 점에서 영화 《마이웨이》의 흥행 실패는 작품이 지닌 역사적 의식 부재와 맞닿아 있다. 사죄를 표명하지도 않은 가해자들과 손을 맞잡는 건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로 가는 퇴행적 행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군함도》가 과연 역사적 의식이 부재한 작품인지 다시 한 번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배우 황정민은 개봉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에게 절대로 ‘국뽕’ 영화는 만들지 말자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일본인은 나쁘고 조선인은 착하다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벗어나 절망 속에서 어떻게든 생을 이어나가려 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자고 류승완 감독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아마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 등이 동일한 국뽕(?)논란에 휩싸인 걸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영화 《군함도》는 이분법적 프레임과 민족주의 신파를 지나치게 경계한 감독의 서사 전개가 오히려 일본의 만행과 조선인들이 겪었던 피해를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관객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와 더불어 영화적 완성도의 미흡, 대기업의 독과점 스크린 지원 등의 논란으로 인해 《군함도》는 대기업에 대한 반감,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의 비극을 오락성과 상업영화로 치부한 제작진과 일부 출연진 등의 안일함 등이 보태져 시사 이슈의 영역으로 휘말리고 말았다. 류승완 감독이 급기야 지난 주말 YTN을 통해 대중의 비판과 우려에 대해 겸허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으나 비난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다만, 나쁜 조선인을 통해 민족 간의 갈등을 더욱 표면화한 영화라는 대중의 비난은 적절하지 못하다. 영화는 2시간 내내 같은 민족을 괴롭히고 일본에 기생한 부역자와 앞잡이를 비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만행 그리고 그들의 변태적 제국주의에 대해 눈을 감고 있지도 않는다. 조선인 위안부를 희롱하며 고문하고 군함도를 지옥의 섬으로 탈바꿈한 일본의 무자비한 만행 역시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착한 일본인, 나쁜 조선인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이 아닌 피해 받은 조선인, 같은 조선인을 수탈한 친일 부역 조선인, 뒤에서 조선인들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분열을 조장하는 제국주의 일본인이라는 삼분법으로 대상을 구분하고 있다.

 

조선인 부역자를 강조했다고 해서 일본의 제국주의 만행이 영화의 초점에서 사라진 건 아니다. 조선인 가해자 또는 부역자를 만든 것도 바로 일본이라는 점을 영화는 직·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제국주의 일본은 민족 간의 갈등과 분열을 유발하기 위해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비판을 드러내고자 한 영화 《군함도》를 역사왜곡, 식민사관 등으로 비난하는 건 합리적이지 못하다. 제국의 상징인 욱일기를 찢어 탈출과 생존의 밧줄로 삼는 장면은 제국주의의 횡포를 넘어서기 위한 강력한 저항 수단이자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모두가 나아가고자 했던 영화적 메타포였다. 욱일기를 찢었다고 해서 반일이라고 칭한 일본이나 이를 또 하나의 국뽕이라고 조롱하는 네티즌들의 비난 역시 옳지 못한 이유이다.

 

영화 《군함도》가 때 아닌 역사적 논란에 휩싸이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 하나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갈등을 바라보는 일본의 태도이다. 일본은 100년 전, 제국주의의 폭압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민족 간의 갈등과 분열을 부채질했다. 거기에 사용된 논리는 철저하게 왜곡된 이념으로 가득 찬 이데올로기였다. 그런 일본이 최근 언론을 통해 《군함도》가 국내에서도 관객들에게 역사왜곡이라는 비난과 외면을 받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지적했다. 일본은 10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갈등과 분열을 부채질하고 또 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일본과 일본에 기생한 친일 부역자의 횡포를 조명한 《군함도》가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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