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가능성 0.1%만 있어도 잡을 수 있다”
  • 김지영 기자·김예린 인턴기자 (young@sisajournal.com)
  • 승인 2017.08.02 13:33
  • 호수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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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호프집 여주인 살해 사건’ 해결, 첨단 수사 기법 동원한 서울청 중요 미제사건 수사팀

 

2016년 초 tvN 드라마 《시그널》이 큰 인기를 끌었다. 과거와 현재 형사들이 무전기로 교감하며 장기 미제(未濟)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었다. 이 드라마 모티브는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중요 미제사건 수사팀(미제팀). 드라마 작가 등 제작진이 미제팀을 찾아가 무슨 일을 하는지 꼼꼼히 취재해 갔고, 드라마에도 실제 반영했다.

 

5년 이상 장기간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다시 파헤친다는 건 여간 지난한 과정이 아니다. 수북이 먼지 쌓인 과거 수사 기록만으로 범인을 다시 뒤쫓아야 한다. 핵심 증인이 사망한 경우도 있고, 증거물도 유실된 경우가 태반이다. 이에 베테랑 형사들의 ‘예리한 촉(觸)’에 의지해야 하는 사건이 적지 않다.

 

서울지방경찰청 중요 미제사건 수사팀. 왼쪽부터 최성준, 윤광호, 김성용 반장, 홍기섭, 김인성, 정지일 팀장 © 시사저널 박정훈

 

재수사 착수부터 체포까지 경찰 ‘촉’ 발동

 

그 촉은 여전히 살아 있다. 미제팀은 최근 2002년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호프집 여주인 살해 사건의 피의자를 구속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15년 만이다. 미제팀은 ‘쪽지문(조각 지문)’ 분석을 통해 피의자를 체포했다. 사건이 발생한 15년 전엔 없었던 첨단 수사 기법이 동원됐다.

 

미제팀은 2002년 12월14일 새벽 2시30분쯤 가리봉동 호프집 여주인 A씨(당시 50세)를 살해하고 금품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피의자 장아무개씨(52)를 6월29일 구속했다. 장씨는 당시 둔기로 A씨를 마구 때려 살해한 다음 A씨 지갑에서 현금 15만원과 신용카드를 훔쳐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사건 당시 경찰은 용의자가 신용카드를 사용한 곳에서 탐문 수사를 벌여 몽타주까지 제작해 공개 수배했다. 하지만 검거에는 실패했다.

 

당시 사건 현장 주변엔 폐쇄회로(CC)TV가 없었다. 용의자도 범행 이후 자신의 지문이 남았을 만한 곳을 모두 수건으로 닦아버렸다. 사건 현장인 호프집 구석에 남은 깨진 맥주병에서 누군가의 오른손 엄지손가락 쪽지문이 발견됐지만 분석할 만한 기술이 없었다. 사건은 그렇게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15년 만에 피의자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발전한 과학수사 기법의 위력이었다. 미제팀은 지난해 10월쯤 “가리봉동 호프집 사건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특유의 촉이 발동한 셈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15년 전으로 돌아갔고 핵심 단서였던 쪽지문을 분석해 내는 데 성공했다. 2012년 경찰이 도입한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이 쪽지문 주인으로 피의자 장씨를 포함한 몇 명의 용의자를 추려냈다. 여기에 사건 현장에서 발견됐던 발자국이 뒷굽이 둥근 형태의 키높이 구두라는 단서도 포착했다. 그러면서 신장이 165cm 정도인 장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피의자 검거 당시 경찰의 ‘촉’은 또 한 번 꿈틀거렸다. 장씨를 서울 양천구에서 체포한 시각은 6월26일 오후 3시30분쯤. 경찰차에 장씨를 태우자 갑자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당시 미제팀 김성용 반장이 피의자 장씨에게 “피해자(호프집 여주인)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지금 날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내리겠느냐. 왜 하필이면 당신(장씨)이 잡히자 비가 내리느냐”고 했더니, 장씨는 꿈쩍 않고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장씨를 서울청으로 압송해 조사했지만 그는 범행을 부인했다. 하지만 구속영장 발부 직전 눈물을 흘리며 범행을 실토했다. 범행 일체를 시인한 다음 장씨는 “반장님이 (나를 체포할 때) 피해자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맑은 하늘에 천둥이 치고 날벼락이 치겠느냐고 말했을 때 굉장히 (내) 가슴을 후벼 팠다”고 고백했다. 장씨는 범행 직후 한동안 은둔생활을 하다 2003년부터 최근까지 택시기사로 일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반장은 “피의자를 처음 보는 순간 ‘촉’이 왔다. 체포영장을 들이대고 몇 마디 대화를 해 보니까 딱 감이 왔다. ‘이 사람이 범인이 맞구나’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7월5일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중요 미제사건 수사팀장인 정지일 경감이 2002년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호프집 살인 사건 범인 검거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10년 이상 장기 미제 살인 사건 260여 건

 

이 사건 재수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2015년 8월1일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남아 있던 모든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폐지됐다. 일명 ‘태완이법’이 발효되면서 공소시효가 사라진 셈이다. 그러면서 장기 미제 사건 수사에도 탄력이 붙었다. 지난해 1월말 미제팀이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미제팀은 서울청 산하 31개 경찰서에서 자원한 베테랑 형사들을 대상으로 정밀심사를 거쳐 꾸려졌다. 형사들의 특기와 활동 지역 등을 감안해 선발했다. 현재 서울청 미제팀은 정지일 팀장을 비롯해 1반과 2반에 각각 5명씩, 모두 11명이 뛰고 있다. 이번 가리봉동 살해 사건은 김성용 반장이 이끄는 2반에서 해결했다. 김성용 반장에게 “미제팀을 처음 구성할 때 형사들의 무슨 특기를 중시했느냐”고 물었다. 김 반장은 “형사들 가운데 통화내역 분석을 잘하거나, 잠복 수사를 잘하거나, 처음 만난 사람한테 친화력 있게 접근할 수 있다거나, 피의자 취조를 잘한다거나 하는 특기들이 있다. 이런 특기를 감안해 미제팀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미제팀 수사는 계속된다. 태완이법 발효로 2000년 8월1일 이전 사건은 공소시효가 소멸돼 수사해 봐야 소용없다. 따라서 2000년 8월1일 이후 사건부터 2012년까지 장기 미제 사건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지 5년 이내인 2013년 이후 발생한 사건은 일선 경찰서에서 수사하고 있기 때문에 미제팀 수사 대상은 아니다. 그런데 2013년 이후 사건도 올해까지 범인을 못 잡으면 내년엔 미제팀으로 넘어간다. 10년 넘게 범인이 안 잡힌 장기 미제 살인 사건은 260여 건에 달한다.

 

김 반장은 “이번 사건 해결로 피해자(호프집 여사장) 원혼을 달래주고,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경찰에 대한 신뢰감을 준 점이 보람이다”며 “예전과 지금의 수사 기법은 확연히 다르다. 과학수사 기법이 많이 발전했다. 범인일 가능성이 0.1%만 있어도 꼼꼼히 분석하면 범인을 잡을 수도 있다. 숨어 지내는 다른 살인 사건 범인들도 가리봉동 사건 피의자가 잡히는 걸 보면서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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