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떠도는 폭행의 망령들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08 14:50
  • 호수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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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하면 대책마련 호들갑…또다시 터지면 책임회피로 일관

 

군대에서의 구타와 가혹행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2014년 육군 28사단에서는 창군 이래 최악의 폭행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인 윤승주 일병(20)은 자대에 배치받은 뒤 선임병들에게 무려 34일 동안 집단폭행과 가혹행위를 당하다 끝내 사망했다. 가해자들의 행위는 단순 폭행을 넘어 인격 모독, 성추행, 비인간적인 행위 등 잔혹한 고문을 방불케 했다.

 

군인권센터의 폭로로 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전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그해 8월에는 민관군병영문화혁신위원회(혁신위)가 출범해 군내 폭력과 가혹행위 근절을 위한 개선안을 내놓았다. 혁신위는 군내 폭력과 가혹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군사법원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양형기준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또 논란이 된 국방 인권 옴부즈맨제 도입과 고충신고 편의성 제고 및 철저한 신고자 보호제도를 구축하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국방헬프콜센터’ 운영을 시작했다. 병영 생활 중 어려운 일이 생기면 누르는 번호다. 군 당국은 “국방헬프콜은 24시간 언제든 전화를 걸면 전문 상담관과 문제에 대해 곧바로 후속조치를 취하는 요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고 강조했다. 폭행이나 가혹행위를 당했을 때 국방헬프콜을 이용하면 즉각적인 대처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군내의 뿌리 깊은 폭행과 가혹행위는 여전하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군 당국의 대처도 적극적인 개선 움직임보다는 은폐하거나 사건을 축소하기에 급급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수도병원에서 투신한 고필주 일병

 

지난 7월19일 오후 4시 경기도 성남의 국군수도병원에서 외진 온 한 병사가 투신해 사망했다. 육군 제22사단 소속인 고필주 일병이다. 고 일병은 올해 4월 현 부대로 전입했다. 자대 배치 후에는 선임병들로부터 지속적으로 폭언, 욕설, 폭행에 시달렸다. 고 일병의 수첩에는 자신이 당했던 가혹행위 등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X새끼’라며 욕을 먹기도 했고, 멱살을 잡힌 적도 있었다. 

고 일병은 훈련 중 부상으로 앞니가 빠진 상태였는데 선임병들은 이를 놀리며 “강냉이 하나 더 뽑히고 싶냐? 하나 더 뽑히면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라고 폭언을 했다. 불침번 근무 중에는 목을 만지고 얼굴을 밀착해 쳐다보며 “왜 대답을 안 하냐?”고 희롱하며 괴롭힌 적도 있었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고 일병은 고충 상담을 통해 선임병들의 폭행 사실을 부대 내 간부들에게 보고했다. 7월14일에는 부소대장과의 면담을 통해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부대가 취한 조치는 고 일병을 ‘배려병사’로 지정하고 GOP 투입에서 배제한 것뿐이었다. 부대는 5일이 지나도록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지 않았다. 가혹행위가 벌어지는 현장에 피해자를 그대로 방치한 것이다.

 

고 일병은 7월19일 수도병원으로 외진을 나왔다. 앞니가 부러진 것 때문에 강원도 고성에서 성남까지 임플란트 시술을 위한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이날 고 일병은 소속 부대 동료와 함께 동료 아버지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부대에서는 인솔 간부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전 11시쯤 치료를 받은 고 일병은 동료를 기다리며 병원 7층에 위치한 도서관에 있다가 오후 3시30분쯤 치료를 마친 동료와 함께 1층으로 내려온 뒤 “도서관에 두고 온 것이 있어 가져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7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 오후 4시쯤 열람실 창문을 통해 1층으로 투신해 사망했다.

 

고 일병이 남긴 지갑에는 “엄마 미안해. 앞으로 살면서 무엇 하나 이겨낼 자신이 없어. 매일 눈을 뜨는데 괴롭고 매순간 모든 게 끝나길 바랄 뿐이야. 그냥 편히 쉬고 싶어”라는 내용의 메모가 발견됐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특별한 보호와 관찰이 필요한 배려병사로 지정해놓고 부대 밖에 인솔 간부 하나 없이 내보내 직무를 유기한 것”이라며 “군이 참극을 자초했다”고 밝혔다.

 

7월24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앞에서 열린 ‘22사단 故 고필주 학우 사망 관련 군대 내 가혹행위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헌병대의 사건 은폐와 축소 시도가 의심되기도 했다. 유족들이 고인의 유품인 유서와 수첩 등을 요구하자 헌병대는 ‘수사 자료’라며 거부했고, 사진 촬영도 제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22사단에서는 김정수 사단장(소장·육사 43기) 등 사단 관계자 누구도 사과하거나 위로하기 위해 유족을 찾아오거나 연락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육군 수뇌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육군은 고 일병과 관련된 폭로 이튿날인 7월21일 정연봉 참모차장(중장·육사 38기) 주관으로 ‘현안 업무 점검회의’를 열었다. 군인권센터가 회의 결과 보고를 입수해 보니 사건에 대한 진상 파악이나 재발 방지 대책 수립 내용이 아닌 사건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한 대응에 중점이 맞춰져 있었다. 더욱이 사건 발생에 대한 반성, 유족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 재발 방지 대책 발표, 엄정 수사 등에 대한 내용은 아무것도 논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고 일병은 홍익대 국어국문학과에 다니다 군에 입대했다. 재학 중에는 국문학도로서 교내외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7월24일 홍익대 총학생회, 국어국문학과 학생회·교수진 등은 서울 마포구 홍익대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 사건과 관련한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을 촉구했다.

 

군 복무 중 당한 구타와 가혹행위는 한 가정을 풍비박산 내기도 한다. 지난 2009년 12월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김한철씨(28). 김씨는 2011년 9월 만기 전역했으나 군에서 당한 가혹행위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고통을 받고 있다. 그는 해병대사령부 의장대원으로 뽑힐 만큼 건강한 체력을 자랑했으나 ‘의장대원’이라는 자부심은 한순간이었다.

 

신병 때부터 모진 구타와 가혹행위가 이어지고, 방치되면서 건강했던 육체와 정신은 완전히 망가졌다. 해병대 출신인 아버지 김종혁씨는 “나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상상을 초월한 가혹행위들의 총합이었다”고 말했다. 한겨울에 군에 입대한 김씨는 계속되는 혹한 속에서 야외 의장 훈련과 기합, 폭행 등으로 악성 비염이 발병했다. 제때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출혈과 악취, 코골이 등으로 병세가 더욱 악화됐다.

 

당시 김씨의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적성적응도 검사’ 자료에 잘 나와 있다. ‘사고 위험군으로 시급한 조치(병영생활 전문상담관 또는 군의관 의뢰)가 필요하다’, ‘대처 능력이 낮으며 망상과 환각, 자살,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점수가 높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복무적합도 검사’에서도 ‘현재 정신과적 문제가 의심된다’거나 ‘정밀 진단이 필요하다. 군 생활에 어려움이 예상되며 사고의 위험이 높다’고 진단해 위험군으로 분류했다.

 

김씨는 2010년 3월10일 수도병원 외래 진료를 통해 악성 비염 판정을 받았다. 그는 비염과 코골이로 인해 지속적인 가혹행위에 시달려야만 했다. 김씨의 증언과 동료 병사들의 진술을 토대로 살펴보면 취침 중 고참병이 김씨의 머리를 불시에 철모로 가격했고, 내무실에서 쫓겨나 화장실에서 쪽잠을 자야만 했다. 또 야간 근무와 새벽 당번을 1개월 이상 연속으로 배치, 하루 2~3시간의 수면으로 버텨야만 했다. 내무실 선임의 무차별 구타로 인해 고막이 파열된 적도 있으나 이를 숨긴 채 방치하다가 병을 키웠다.

 

보훈병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부상 장병이 경례하는 사진을 바라보는 김한철씨 © 사진= 김한철 제공

 

가혹행위 피해자의 끝없는 고통

 

김씨는 악성 비염이 발병한 지 16개월 뒤인 2011년 7월 편도절제수술을 받았다. 그 뒤에도 각종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수술 부위 통증과 출혈을 시작으로 심각한 설사 증세(하루 30번까지)를 보이며 일주일 만에 체중이 11kg나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또 손발 떨림과 어지럼증, 무기력 증상(전형적인 갑상선항진증 예후 증상)을 보이면서 22일 동안 수도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김씨는 이런 상황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다. 당시 집안 사정이 극도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김씨의 아버지는 20여 년간 청춘을 바쳐 일궈 온 국내 대기업과의 협력 사업이 원청과의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면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됐다.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생계까지 막막해졌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은 수업료와 급식비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학원 보조강사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김씨는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잘 지내고 있다”, “걱정 마시라”며 가족을 안심시켰던 것이다.

 

부대에 복귀한 김씨는 의장 훈련과 행사 투입으로 손발 떨림 증상이 나타났다. 의무중대를 찾아 하반신 감각 이상 증세까지 호소했지만 수술 후유증이라며 제대로 된 치료나 정밀진단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 김종혁씨는 “당시 의무기록지와 동료들의 진술을 보면 이미 갑상선항진증의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의무중대에서는 이를 판단할 역량과 시설이 없는 상태에서 마냥 방치됐다”며 분개했다.

 

김씨는 전역 한 달 후인 2011년 10월 하반신 마비와 호흡 곤란 증세를 보여 119 구급대에 의해 고려대 안산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부정맥’과 ‘갑상선항진증’ 확진 판정을 받았다. 김씨의 병세는 더욱 악화됐다. 호흡 곤란과 마비 증상에 안구 돌출도 갈수록 심해졌다.

 

2012년 초에는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으나 고막파열만 인정받고 갑상선항진증에 대해서는 거부됐다. 이에 따라 올해 초 법률구조공단의 도움으로 행정소송을 해서 승소했으나 서울고등법원에서는 패소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해병대사령부가 보훈청의 사실조회에 부대 내 근무일지를 임의로 왜곡하는 거짓 답변서를 제출함으로써 패소했다. 해병대사령부의 책임회피와 모르쇠로 일관하는 행태는 치졸하고 비열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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