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때 북한군 개입, 교도소 습격 “말도 안 되는 소리”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0.27 09:41
  • 호수 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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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보고서 통해 드러난 ‘5·18 광주 진상’…“시위대 폭도화 주장 위해 사실관계 왜곡”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7년이 됐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5·18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부가 공식 인정한 사망자는 191명, 부상자는 852명이다. 하지만 사망자 수에 대한 논란도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총에 맞아 죽은 시민은 있었지만 발포 책임자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수많은 왜곡이 난무한다. 신군부가 남긴 기록은 광주시민들의 민주항쟁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했다. 신군부에 의해 왜곡된 사실과 조작된 기록은 ‘5·18의 살아 있는 망령’이 되어 광주시민들의 아픈 상처를 후벼 팠다.

 

5·18 당시 전남 치안총수는 안병하 전남경찰국장(경무관)이었다. 안 국장은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해 수많은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살렸고, 경찰의 명예를 지켰다. 만약 경찰이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고 발포했다면 광주의 역사는 ‘피의 학살극’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경찰은 정권의 눈치를 보며 5·18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5·18을 거론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다. 그리고 경찰의 명예를 지킨 고(故) 안병하 국장과 그의 가족들을 외면했다. 심지어 시위대와 대치하다 순직한 경찰관 4명도 기억하지 않았다.

 

그런 전남 경찰이 뒤늦게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이라는 보고서를 펴냈다. 경찰이 보고서 형식으로 5·18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지금까지 경찰의 행태로 보면 진정성에 의문이 가지만 그나마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에는 광주의 치안 상황과 계엄군의 과격 진압, 시위대의 무기 탈취 과정, 북한군 개입설, 교도소 습격 등이 상세하게 들어 있다. 전남 경찰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당시 현장에서 활동했던 경찰관들의 증언과 새로운 기록 등을 조사했다. 보고서의 상당부분은 ‘전두환 회고록’을 거론하며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1980년 5월19일 전남 도청 앞에서 수많은 군중과 버스에 탑승한 시위대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왼쪽). 전남경찰서에서 작성한 보고서 © 사진=연합뉴스

 

“북한군 수백 명 활동, 상식 밖의 주장”

 

5·18 당시 대부분의 사망자는 총격전에 의해 발생했다. 때문에 발포 책임자와 시민군의 무장 시점은 오랜 논란이 돼 왔다. 신군부는 “무장한 시민군의 발포로 군의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군 기록에는 시위대의 발포와 계엄군의 사상에 대한 내용은 있으나, 공수부대원의 발포로 인한 시민들의 사망 보고는 없다. 군의 여러 기록에는 도청 앞 발포 상황이 일괄적으로 누락됐다.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광주 시내 경찰서의 무기는 19일에 소산이 완료됐다. 20일 밤 광주세무서에서 칼빈 소총 17정이 피탈됐으나 실탄이 없었다. 계엄군의 발포는 20일 밤 광주역 부근에서 시작돼 21일 오후 1시쯤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가 이뤄졌다.

 

이때부터 시위대의 무기탈취가 시작됐다. 21일 오후 1시30분쯤 나주경찰서 함평지서를 시작으로 화순 등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무기가 피탈돼 시민군이 무장했다. 계엄군의 발포가 시민군의 무장을 부추긴 셈이다.

 

물론 이때까지 시민군의 총기발사는 없었다. 계엄군 사상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21일 전남도청 집단 발포 이전에 총상에 의한 부상자나 사망자가 없었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보수논객 지만원씨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군 600명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다수의 희생자 사진 등을 제시하며 북한군이 조직적으로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지씨는 한발 더 나아가 당시에 촬영된 사진 속 광주시민들을 북한 특수부대원, 일명 ‘광수’라고 지목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지난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반란이자 폭동으로 규정했다. 회고록에는 “전개된 일련의 상황들이 지금까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북한 특수군의 개입정황이라는 의심을 낳고 있는 것이다” “5·18사태 당시 광주 현장에 있던 군 관계자들의 증언이나 진술, 기자 등의 목격담 이외에 관련 자료나 정황증거 등을 들어 연·고대생으로 알려졌던 600명의 시위대가 북한의 특수군이라는 주장이 몇몇 연구가들에 의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고 적고 있다. 지만원씨와 같은 주장이다.

 

이에 대해 전남 경찰은 지씨와 전 전 대통령의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당시 경찰·보안사·정보부 등 어디에서도 ‘북한군’과 관련한 내용이 언급된 게 없다는 것을 전제로 들었다.

 

강성복 전남지방경찰청장은 “당시 광주에는 130여 명의 정보·보안 형사들이 활동했고, 시내 주요 지점 23개소에 정보센터를 촘촘하게 운영했는데, 이런 형사들의 눈을 피해 광주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수백 명의 북한군이 활동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식 밖의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5·18 전후 정보형사와 현장 경찰관들도 “5·18 시작부터 계엄군이 들어오는 전 과정에 현장에 있었으나 관계기관이나 현장경찰관들끼리도 북한 관련 첩보는 전혀 거론된 바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북한군 개입설을 일축했다. 나주·화순 등지에서는 시민군들이 간첩 용의자를 잡아 경찰에 신고·인계하기도 했다. 

1985년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상황’에는 시민군의 세세한 활동까지 시간대별로 기재돼 있다. 여기에도 북한군 관련 내용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북한군의 의도적 거론은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려는 시도로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5·18 불순분자 소행으로 몰기 위한 조작”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광주사태 진상 조사’ 등 여러 문헌에는 5·18 당시 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85년 국방부가 펴낸 ‘광주사태의 실상’을 보면 “무장 폭도들의 가장 위험하고 대담한 시도는 광주교도소에 대한 공격이었다. 당시 간첩 및 좌익수 170여 명을 포함한 2700여 명의 복역수가 수용된 광주교도소는 낮 12시20분쯤 폭도들의 습격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에 가담한 폭도의 대부분은 과거 이 교도소에 복역했던 전과자, 당시 수용 중인 복역수의 가족 및 이들을 탈옥시키려 했던 극렬시위자 등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신군부와 우익에서는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면서 그 예로 ‘교도소 습격 사건’을 들었다. 박근혜 정부 초대 국정원장이었던 남재준씨는 지난 4월18일 ‘5·18 바로알리기 대회’에 참석해 “5·18 당시에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판결을 내린 일부 사상범까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를 총을 들고 습격한 것이 과연 민주화를 위한 것이었느냐”며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위대의 ‘교도소 습격설’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광주교도소장이었던 한도희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5·18 당시 시민들의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느냐.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도 지난 2007년 보고서를 통해 “5·18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기 위한 의도에서 조작됐음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경찰이 작성한 각종 문헌에도 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 배치된 3공수여단의 연행자 강경 진압과 단순 통행자에 대한 총격으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돼 있다.

 

5월21일 오후 경찰에서 연행한 시위대를 광주교도소로 호송하면서 천막을 씌운 트럭으로 수송했다. 일부 흥분한 공수부대원들이 호송트럭 안으로 최루탄과 가스를 집어넣고 진압봉으로 가격하거나 군화발로 구타하면서 질식사 등으로 6명이 사망했다.

 

같은 날 오후 차를 타고 교도소를 지나가던 담양 주민 4명이 총격을 받아 이 중 2명이 사망했다. 5월22일 오후 교도소 옆 진입로 입구에서 트럭을 타고 통과하던 시민 3명이 총격을 받아 1명이 사망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교도소 습격 사건은 시위대의 폭도화를 주장하기 위해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민군 점령기간 치안상황 안정 유지

 

시민군 점령기간 광주 시내 치안상황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다. 73만 명의 대도시에 대량의 무기가 유출됨에 따라 총기 관련 사건·사고가 일어날 개연성이 농후했지만 경찰 기록에는 2건, 법원 판결문으로 확인된 것은 3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방부, 안기부 등에서는 특정 사건을 반복해서 기재하거나, 구체적 피해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사건을 나열했다. 계엄군 철수 이후 무장 폭도에 의해 광주 시내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노림수였다.

 

5월26일 동구 학운동에서는 방위병이 개인적 감정으로 친아버지 등 가족 3명을 칼빈 소총으로 살해했다. 군과 안기부는 이것을 무장 폭도에 의한 여러 개의 사건처럼 기재하며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두환 회고록 등 일부 기록은 안병하 국장이 5월21일 당시 “지휘권을 포기하고 연락 두절됐다”고 기재하고 있다. 근무지를 무단이탈하고 진압 업무에 실패해 광주의 불행을 야기한 무능한 지휘관으로 묘사돼 있다. 경찰 내부 일각에서도 이런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남 경찰의 조사결과 안 국장은 5·18을 맞이해 단 한 번도 근무지 이탈을 하지 않았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했고,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에 뒀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경찰청은 ‘2017년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안병하 국장을 선정해, 현재 추모흉상을 제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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