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트럼프에 직격탄 맞은 김정은의 도발카드는?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1.16 09:20
  • 호수 1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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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에 들어간 김정은, 트럼프 방한 전부터 칩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직격탄을 맞았다. 아시아 순방 일환으로 한국을 찾은 트럼프가 11월8일 국회 연설에서 김정은을 ‘독재자’ ‘폭군’으로 묘사하며 비난을 쏟아낸 것이다. 더욱이 “북한은 당신의 할아버지(김일성)가 그리던 낙원이 아니다. 그 누구도 가서는 안 되는 지옥”이라며 북한 체제를 지구상 최악으로 꼽았다. 3대 세습을 통해 권력을 넘겨받은 김정은으로선 자신의 존립 기반인 북한 정권의 시조이자 할아버지인 김일성까지 싸잡아 비난한 공개연설을 코앞에서 듣게 된 것이다.

 

미국 대통령으로선 27년 만에 대한민국 국회 연단에 선 트럼프의 대북 발언은 거침없었다. 북한 체제를 ‘감옥 국가(Prison state)’로 규정한 트럼프 대통령은 “이 잔인한 독재정권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란 제멋대로의 기준으로 주민을 평가하고 점수 매기고 계급을 나눈다”고 비판했다. 정치범 수용소와 강제노동, 고문과 기아·강간·살인 등의 문제를 포함해 구체적인 북한 체제의 문제점을 열거한 뒤 “헛된 희망에 젖어 핵무기를 추구 한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해 거친 말을 쏟아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8월엔 북한을 향해 대미 위협을 중단하라며 “그렇지 않으면 지금껏 전 세계가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 솔직히 말해 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선 “미국과 동맹을 방어해야 한다면 우리는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늙다리 미치광이’ 등의 거친 발언으로 응수했지만, 화를 제대로 풀지는 못한 듯 보였다.

 

그런데 이번엔 트럼프 대통령이 서울까지 날아와 한국의 발전상과 민주주의 성장을 치켜세우고, 북한을 폭압통치 국가로 비판하는 행보를 보인 것이다.

 

방한 중인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11월8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트럼프, 3개국 순방으로 대북제재 강화

 

트럼프의 방한을 전후해 김정은은 은둔에 들어갔다. 동선 노출을 꺼려 공개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한·미 합동 군사연습이 열리는 기간을 포함해 김정은의 신변보호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면 공석(公席) 등장을 중지한다.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 도발로 미국과 국제사회를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한·미 연합전력은 참수작전 등 북한 수뇌부에 대한 제거를 상정한 계획을 세워 훈련을 실시해 왔다. 트럼프 방한에 맞춰 한반도에 대규모 항모 강습단이 전개되고 전폭기가 출격 태세를 갖추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연출되자, 김정은은 벙커 생활로 추정되는 칩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중국으로 이어진 트럼프의 아시아 3국 순방이 마무리되면서 김정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트럼프의 이번 순방을 통해 한·미·일 3각 대북 공조체제가 보다 굳건해진 건 물론이고 중국까지 대북 압박 수위를 올리는 형국이 마련됐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과의 11월9일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를 엄격히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직접 밝히는 등 북한에 불리한 형세가 만들어지고 있다. 미·중 정상이 대면을 통해 2500억 달러(279조원 상당)에 달하는 투자무역 협정을 체결하는 등 경제적 이익추구에 합의하면서 북한 문제는 부차적인 이슈로 다뤄지는 느낌이 들 정도다. 미 국방부 장관의 방중과 미·중 합동 참모본부 사이에 재난 시 구조 협력 등에 의견접근을 이루는 등 군사협력도 첫걸음을 내디딘 상황이 됐다.

 

김정은으로선 꺼내들 대응카드가 마땅치 않은 국면을 맞았다. 연초부터 탄도미사일 위협을 고조시켜온 김정은은 7월 두 차례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호’ 발사를 통해 미국과 국제사회를 뒤흔들었다. 9월 6차 핵실험은 그 정점이었다. 하지만 이후엔 별다른 도발행보를 보이지 않은 채 지난 10월초 노동당 7기 2차 전원회의를 통해 권력 내부를 정비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여왔다. 화장품 공장이나 자동차 생산라인 등을 돌아보는 민생 챙기기 제스처도 드러냈다.

 

도발 국면을 중단한 지 두 달 가까이 되자 평양 권력의 속사정에 눈길이 모아진다. 숨고르기라고 보기에는 공백이 너무 길어진다는 점에서다. 그만큼 김정은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대북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김정은이 핵·미사일 도발카드를 단기간에 너무 무리하게 써버렸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로버트 칼린 미 국제안보협력센터(CISAC) 객원연구원은 11월7일 “북한이 한 걸음 더 치명적인 발걸음을 내딛는 게 자칫 낙타의 등을 부러뜨리는 최후의 지푸라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일각에선 북한이 조심스레 대화 국면으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한다. 추가 도발카드가 소진된 상황에서 러시아를 활용하거나 북·미 간의 1.5트랙(반민반관)을 활용한 대화 모색 등이 추진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北 “대북제재 때문에 여성과 어린이 고통”

 

하지만 방한 기간 중 트럼프가 쏟아낸 대북 비판 발언과 일본은 물론 중국까지 가세한 대북 압박에 북한의 선택은 제약받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트럼프가 귀국한 상황에서도 한반도 수역에 니미츠함 등 미 핵추진 항공모함 3척을 집결시켜 대규모 한·미 공동훈련을 실시한다. 말폭탄뿐 아니라 강력한 대북 무력시위를 통해 김정은을 몰아붙이겠다는 입장이다.

 

북한체제 내부에선 대북제재로 인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가 11월8일 “대북제재 때문에 여성과 어린이가 고통받는 등 취약계층이 희생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게 대표적이다. ‘어떤 제재에도 끄떡없다’던 이전 태도와는 달라졌다. 북한 당국이 무상에 가깝게 공급하던 전기료를 3000배 가까이 올렸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축하 분위기로 떠들썩하던 북한 관영 선전매체들도 잠잠해졌다. 트럼프 방한 당시의 반미 시위로 지면을 채우는 등 대남 선동 쪽으로 무게를 옮겨갔다.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면전에서 모욕을 당한 김정은으로선 절치부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대로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국제사회는 물론 체제 내부의 엘리트와 주민들에게도 체면을 구길 수 있다. 장고(長考)에 들어간 김정은의 다음 도발카드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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