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열 명장 “조선 왕의 색 대홍, 손끝으로 뽑아낸다”
  • 최예린 인턴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1.19 14:16
  • 호수 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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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조선 전통 방식 ‘홍염장’ 보유자 김경열 명장

 

가히 홍(紅)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종류의 붉은색이 존재했던 조선이었지만, 그 붉은색을 자유로이 몸에 걸칠 수 있는 자는 왕족뿐이었다. 붉은색을 물들이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 한 명이 하루 종일 따도 채 한 근을 따지 못하는 홍화가 두 근이나 있어야 드디어 한 번의 염색을 할 수 있다. 그 염색을 30번 반복해야 비로소 임금의 옷, 어의(御衣)에 쓰이는 ‘대홍’이 나온다. 그 귀한 홍색을 만들어내는 장인이 바로 홍염장이다.

 

지난해 4월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9호에 조선 전통의 방식으로 붉은색을 물들이는 장인 홍염장이 지정됐다. 그 보유자로 인정된 인물이 김경열 명장이다. 44년 동안 직물과 염색 공예에 매진해 온 그는 2008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2013년 대한민국 명장으로 지정됐다.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에 위치한 공방에서 김경열 명장을 만났다. 

 

김경열 명장

 

 

일반인들한테는 홍염이 생소하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던 옷과 용구에 사용되던 붉은색을 내는 염색 방법이다. 홍염을 통해 임금님이 입었던 홍룡포 같은 궁중의 여러 복식, 또 궁중에서 사용되던 생활용, 장식용 도구를 만든다. 예전에 궁중에는 홍염장이라는, 붉은 염색을 하는 전문 장인들이 있었다.”

 

 

조선시대 전통 방식이면 굉장히 손이 많이 가겠다.

 

“재료 재배부터 시작해 모두 조선시대 수작업 그대로다. 홍염의 대표적 재료가 홍화라는 꽃이다. 홍화는 3~4월에 파종하고 6~7월에 채취한다. 채취해 어떤 꽃은 건조하고, 어떤 꽃은 생으로 절구에 찧은 다음 홍떡을 만든다. 홍떡을 만들려면 찧은 꽃을 연수에 넣어 노란 색소를 빼고, 쌀뜨물을 삭힌 물에 처리하고 24시간을 재워야 한다. 쌀뜨물에 발효된 것을 건조하면 홍떡이 된다. 잿물을 이용해 또다시 홍떡에서 붉은색을 추출하고, 오미자초를 넣으면 그제야 염액이 완성된다. 날씨가 쌀쌀해질 때 이 염액으로 염색하면 색깔이 선명하고 아름답다.”

 

 

재료 재배도 직접 하나.

 

“반은 농사꾼이다. 단양에서 직접 홍화를 재배하고 있다. 원래 파주 보광사 밑에서 했었는데, 거긴 자연수가 없다. 단양은 물이 아주 좋다. 물론 여기 경복궁 터에서 나오는 물도 좋아서 옛날 조상님들은 멋있는 색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기회를 주면 경복궁 터에 가서 해 보고 싶다.”

 

 

붉은색을 내는 재료가 많은데 굳이 홍화를 사용하는 이유가 있나.


“다른 재료로는 저런 아름다운 색깔이 안 나온다. 홍색 하면 염재(染材)로는 소목도 있고, 꼭두서니·자초·지치·오미자도 있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색을 내고, 오래전부터 임금님이 입던 대홍색을 내는 재료가 홍화다.”

 

 

대홍이라는 특별한 붉은색이 따로 있는 건가.

 

“30번 정도 염색해 얻어지는 아주 진한 홍색이 대홍이다. 분홍도 다 같은 분홍이 아니고 연홍·수홍·다홍이 있고 또 주홍·진홍·천홍·목홍·대홍까지 해서 홍색만 30가지가 넘는다. 여러 번 염색하면서 단계별로도 색깔이 점점 진해지지만, 직물에 따라서도 색깔이 다르게 나온다. 식물성 섬유는 홍색소만 빨아먹고, 명주는 홍화꽃의 노란 색소까지 같이 먹는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색이 있나.

 

“역시 대홍색이다. 조선을 대표했던 색깔이고, 그 색깔 하나가 임금님의 권위를 갖고 있었던 색이다. 다른 모든 서민들은 백색을 입었을 때, 이런 붉은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 생각해 보라. 이렇게 아름다운 색깔을 어찌 선호하지 않았겠는가.”

 

 

“장인의 명예 받았다고 끝나는 게 아냐”

 

어려서부터 공방생활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어느 가정이든지 살다 보면 어려워질 때가 있다. 학교 다닐 때 어려운 시기가 와서, 중학교 3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외삼촌댁 명주실 공방에 입문했다. 자연스럽게 도제식으로 실을 해사, 정련, 표백, 염색하는 기술을 배웠다. 어린 나이니까 많이 힘들었다. 공부하던 때와 전혀 다른 생활을 하니까, 밤에 누우면 나도 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게 배워야 될 기술이라면 빨리 배우자, 그래서 더 열심히 배우게 됐다.”

 

 

그때 했던 공방생활이 지금도 도움이 되는지.

 

“그때 손끝으로 익힌 기술이 문화재 복원작업에 큰 도움이 됐다. 어떤 직물을 어떻게 정련·표백할 때 염색이 가장 잘되는지, 그 감각을 배웠기 때문에 복원이 순조로웠다. 지금 보면 내가 이런 사람으로 일생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렸을 때 가난해졌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언제부터 홍염을 시작한 건가.

 

“1982년에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부터 내 공방을 시작했다. 이쯤부터 도움을 주신 좋은 분들과 대화하고 문화재를 복원하면서 전통염색과 홍염을 시작했다.”

 

 

어떤 문화재를 복원했나.

 

“제일 처음에는 복원이라기보다 학생 교재에 들어가는 사군자 등의 그림을 샘플링했다. 그런데 밑그림부터 시작해 염색한 명주실로 그림을 그리는 그 과정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때부터 시작해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점점 전문성을 갖게 됐고, 문화재를 복원하게 됐다. 명성황후 10첩 병풍, 충무공 이순신 5대손 이봉상 장군 갑옷, 순천 선암사의 대각국사 가사(袈裟), 미국 클리블랜드 박물관에 있는 티베트 고승의 가사 등을 복원했다.”

 

 

복원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하나 다 중요하다. 그래도 내가 홍염장이다 보니까, 티베트 가사가 마음속에 많이 남는다. 염색문화를 잘 보여줄 수 있었다. 20년 가까이 그렇게 한 점 한 점 해 오던 가사 복원을 모아서 2007년에 가사전을 열기도 했다.”

 

 

후진 양성도 하고 있나.

 

“많이 부족하지만 대학원 특강이나 다양한 행사를 통해 기회만 되면 전통문화를 알리려고 노력한다. 지금 60살인데 그새 문화가 단절되는 게 보인다.”

 

 

지난해 4월에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홍염장 보유자로 지정됐는데.

 

“정말 책임감이 느껴지는 말이다. 장인은 그저 어떤 명예를 받았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꾸준히 생산해 내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많은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새 집중하는 작업이 있나.

 

“홍염을 어떻게 현대에 맞게 디자인하고 브랜드화할지 구상하는 중이다. 홍염으로 대홍색을 낸 넥타이 같은 소품은 실생활에서도 훌륭한 장식물이다. 대홍은 임금의 색이니. 대홍색 넥타이를 문재인 대통령께도 드리고 싶다. 전통이 전통으로 끝나지 않도록 기초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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