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시간 내리 일하는 어느 드라마 스태프의 노동 잔혹사
  • 박소정 인턴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05 14:06
  • 호수 1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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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스태프 A씨, 수기 작성한 자신의 근무 일정 시사저널에 보내와

 

‘28시간’. A씨의 근무 기록표에 적힌 하루 노동시간이다. KBS 한 드라마의 스태프 A씨는 수기로 작성한 자신의 근무 일정을 1월말 시사저널에 보내왔다. 총 15일 동안의 기록이었다. 이 기록표에 따르면, 스태프는 다음 날 새벽 시간을 포함해 최대 28시간을 현장에서 일했다. 스태프 대부분은 하루에 최소 15시간 일했다. 8시간30분을 근무한 날은 단 하루였고, 온전한 휴일은 3일에 불과했다.

 

기록표를 제보하긴 했지만 후환이 두려워 언론사와 접촉하지 않기로 했다는 A씨와 간신히 연락이 닿았다. A씨는 “무리하게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사고가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라며 “조수들은 계약서를 본 적도 없다고 한다. 초과근무 비용을 주지 않는다는 안 좋은 소문이 돌자 뒤늦게 지급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하루 평균 노동시간 19시간39분

 

드라마 현장 스태프의 장시간 노동과 이로 인한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재작년 10월26일 드라마 《혼술남녀》의 신입 조연출인 이한빛 PD가 열악한 근무환경 등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제작현장의 사고는 계속됐다. 지난해 12월23일에는 드라마 《화유기》 스태프가 세트장에서 추락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다. 또 올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인 드라마 《킹덤》의 한 미술 스태프는 1월16일 뇌동맥류 파열로 사망했다. 두 사고의 원인이 장시간 노동이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스태프들은 이 같은 사고 후에도 드라마 제작 환경이 바뀌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프리랜서 스크립터로 일하고 있는 B씨는 사고 이후 제작 현장에 달라진 점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단호하게 “없다”고 답했다. B씨는 “본사로부터 ‘안전하게 촬영하라, 무리하지 마라’는 지침만 내려올 뿐, 실제 드라마를 만드는 외주 제작사는 별 반응이 없다”고 말했다. 카메라팀 스태프로 일하고 있는 C씨는 “하루 20시간 일을 하고 찜질방에서 자는 게 일상”이라고 이야기했다. 또 다른 현장 스태프 D씨는 “첫날 밤새우는 건 할 만하다”면서도 “2일 차 밤을 새우면 몽롱해지고 3일 차를 넘기면 제정신이 아니다”고 말했다.

 

언론노동조합·청년유니온 등이 참여한 드라마 제작 환경 개선 전담팀은 1월26일부터 2월14일까지 현재 촬영 중인 드라마의 제작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했다. 110명의 응답자가 밝힌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9시간39분이었다. 한편 하루 평균 휴식시간은 2시간44분(유효 응답자 101명)에 불과했다.

 

© 일러스트 김세중


 

장시간 노동 문제가 근절되지 않는 원인으로는 ‘불합리한 고용계약’이 지적된다. A씨는 “제작사가 개별 스태프와 따로 계약을 맺지 않고 팀 단위로만 계약을 체결하는 ‘통계약’이 문제”라고 언급했다. 통계약 구조에서는 팀장이 현장 스태프의 근무시간이나 임금을 임의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A씨는 “임금 단가도 제각각이고, 몇 시간을 넘겨야 초과근무수당이 주어지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계약서 없는 방송제작 현장의 관행은 일상화돼 있다. 이상돈 국민의당 의원이 지난해 10월12일 발표한 방송제작 스태프 계약실태조사에 따르면, 방송제작 스태프 응답자 2007명 중 76.2%가 서면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러한 불합리한 고용계약과 근로환경에 대해 제작사와 방송사 모두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한 드라마의 외주 제작사 관계자는 “제작사는 촬영팀·조명팀 등의 단위로 계약을 하는 것이지 스태프 개개인과 계약한 것이 아니다”며 “제대로 계약을 챙기지 않은 스태프들의 잘못도 있다”고 말했다. 또 “(스태프들이) 현장에서 제대로 요구한 적도 없는데 일부러 드라마 끝나기만을 기다려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제작사 쪽에 좋지 않은 감정을 품어 그러는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편성권을 쥔 방송국은 계약 문제를 외주 제작사의 책임으로 돌렸다. 한 드라마 책임 프로듀서 K씨는 “방송국은 현장 상황을 잘 모른다”며 “계약 주체는 방송국이 아니라 외주 제작사다. 방송국이 관여하는 순간 월권이 된다”고 말했다. 장시간 노동 문제에 대해서는 “드라마 업계 특성상 노동시간이 과하다는 건 어차피 이쪽 사람이면 다 알고 있는 것”이라며 “불만을 제기하는 걸 보니 일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계약 문제 명확히 하고 ‘근로자성’ 인정해야”

 

정부도 이러한 문제를 인지했지만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4년 8월 ‘방송영상프로그램 제작 스태프 표준계약서’를 마련해 발표했다. 표준계약서에는 스태프들이 정당한 노동환경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만, 실제 활용 여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강제 사항이 아닌 권고에 그치기 때문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활용도에 대한 최근 통계는 없다”며 “올해 실태조사를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행법상 드라마 스태프들은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다. ‘근로자성’이 인정되지 않아 노동자가 아닌 ‘예술가’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근로자성이란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로 판단하기 위한 기준을 의미한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방송업계에는 다양한 케이스의 종사자가 있기 때문에 근로자성을 획일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며 “이제부터라도 그 실체를 파악하고 기준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고(故) 이한빛 PD의 동생인 이한솔 한빛(방송 종사자를 위해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단법인) 이사는 계약 문제가 해결되고 스태프들의 근로자성이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에 합당한 임금 체계가 잡히고, 이를 기반으로 한 계약서 작성이 제도화된다면 드라마 현장 스태프를 혹사시키는 문제들이 일부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도 안 바뀌면 대체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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