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전해준 중년 로맨틱 코미디 《키스 먼저 할까요》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22 14:24
  • 호수 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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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힘’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새 지평을 열다

 

SBS 월화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가 10%대 시청률로 순항하고 있다. 동시간대 드라마 중에서 압도적인 수치로 1위다. 비난이 쏟아지면서도 시청률이 잘 나오는 드라마도 있지만, 《키스 먼저 할까요》에 대해서는 대부분 호평이다. 모처럼 공감할 만한 어른 멜로가 등장했다는 평이다.

 

메마른 삶을 사는 중년들의 이야기다.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간부가 되지 못하고 일반직 스튜어디스로 일하는 안순진(김선아)의 생활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세계 여행지를 누비는 스튜어디스의 낭만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공항과 공항 사이를 오가며 일과를 반복할 뿐이다. 아이가 죽은 후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이어왔다. 남편하고는 진작 이혼했고, 집 안엔 치우지 않은 옛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야말로 간신히 숨만 쉬는 무채색의 생활이다. 사랑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키스 먼저 할까요》의 한 장면 © SBS 제공


 

김선아와 감우성의 또 다른 ‘인생 캐릭터’

 

50세의 광고회사 간부인 손무한(감우성)도 무채색의 삶을 산다. 이혼 이후 세상과 단절하고 회사와 집을 오가면서 오직 반려견만을 벗 삼아 사는 것이다. 반려견은 노환으로 시한부 상태다. 쓸쓸히 죽을 날을 기다리는 반려견의 모습이 손무한의 모습과 정확히 겹친다. 손무한에게도 사랑이나 설렘, 낭만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고 지나간 청춘의 추억일 뿐이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난다. 어른들의 만남이라 처음부터 비아그라가 나오고 모텔이 등장했다. ‘사랑합니다’보다 ‘자러 올래요’라는 대사가 먼저 나왔다. 사랑보다 키스가 먼저였다. 하지만 이들은 이내 설렘의 감정을 확인한다. 각자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준다. 이들의 동침은 서로를 편하게 잠들 수 있게 해 주는,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위안이었다. 이러한 중년의 사랑이야기에 시청자들이 반응했다.

 

김선아는 《키스 먼저 할까요》에서 또 다른 ‘인생 캐릭터’를 선보인다. 김선아의 첫 번째 인생 캐릭터는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의 김삼순 역할이었다. 당시 50%대의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김삼순 신드롬을 일으켰다. 김삼순 역할로 MBC 연기대상까지 받았다. 김선아는 오랫동안 김삼순으로 기억됐다.

 

김삼순의 기억을 지울 만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선아의 연기력과 매력을 충분히 살려줄 히트작이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인 2017년에 JTBC 《품위있는 그녀》에서 김선아는 마침내 또 다른 인생 캐릭터를 만난다. 바로 정체를 숨기고 재벌 회장을 유혹하는 가사도우미 박복자 역할이었다. 김희선의 컴백작이기도 한 이 작품을 통해 김선아와 김희선이 모두 시청자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박복자 역할은 요즘까지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패러디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을 통해 김선아의 연기력과 존재감이 재발견됐다. 김삼순 역할로 이미 코믹 연기는 정평이 났었는데, 《품위있는 그녀》에선 정극 연기도 정점에 올랐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키스 먼저 할까요》가 등장한 것이다. 여기선 코믹과 멜로의 설렘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손무한이 알약을 꺼내 먹자, “그거 비아그라 아니냐”고 오해하는 장면에선 김선아의 연기력 때문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마음속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공허한 삶을 생생하게 구현해 시청자를 먹먹하게 했다.

 

손무한 역할의 감우성도 오랜만의 컴백이다. 감우성은 2006년 손예진과 함께한 SBS 《연애시대》에서 이동진 역할로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었다. 이때 이후 12년 만에 멜로 주인공으로 다시 부각되고 있다. 마치 《연애시대》의 이동진이 그대로 나이 먹은 것 같다는 평도 나오고, 나이 먹으면서 젊었을 때보다 더 매력이 살아났다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외모를 젊고 아름답게 가꾸는 ‘꽃중년’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중년의 매력이다. 연륜에서 나오는 그윽한 향 같은 것, 그런 매력을 감우성이 선보였다.

 

《키스 먼저 할까요》의 한 장면 © SBS 제공


 

설렘 전해준 중년 로맨틱 코미디에 시청자 공감

 

드라마 초중반 두 사람의 사랑에 오랜만에 설렘을 느꼈다는 시청자들이 속출했다. 과거 같았으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일이다. 산전수전 다 겪어 메마르고 공허한 삶을 사는 중년, 연차가 쌓여 그윽한 향을 풍기게까지 된 그런 중년의 사랑이 설레는 정서로 드라마에서 표현되기는 어려웠다. 중년 이상 세대를 주 시청층으로 하는 주말드라마에선 높은 연령대의 러브라인도 종종 등장했지만, 주중 미니시리즈는 청춘 멜로의 독무대였다. 최근 들어 30대의 사랑도 등장하긴 하지만 ‘노안으로 글씨가 잘 안 보이고 연골이 닳아서 뼈끼리 부딪히는 퇴행성관절염이 온’ 그런 연령대의 사랑 이야기를 미니시리즈에서 보긴 어려웠다.

 

더군다나 초중반 드라마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였다. 한류 청춘 멜로의 최전선에 있는 장르로 여기서 중년 세대는 청춘스타의 부모나 이모, 삼촌 정도로나 얼굴을 비친다. 바로 그런 로맨틱 코미디에서 40대 후반과 50세의 사랑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룬 것이 매우 이례적이고, 그것을 시청자들이 별다른 이질감 없이 편하게 받아들이면서 공감하는 풍경도 놀라운 일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고령화되면서 삶의 허리 부분이 길어진다. 과거에 청춘 세대의 전유물이었던 취미활동이 중년 세대에게로 넘어간다.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누군가의 팬으로 활동하고, 공연을 보며 열광한다. 요즘 중년 세대는 정서적으로도 과거 중년 세대와는 다른 청춘의 정서를 표출한다. 늦게까지 결혼을 안 하거나 이혼해서 혼자 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로맨스에도 적극적이다. 그런 인구가 많아지면서 이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미니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안순진은 스스로를 ‘(나이를 많이 먹어) 꽃이 아니라 풀때기가 된 여자’ ‘누군가의 손에 조심스레 꺾이고 싶은데 아무 신발에나 밟히는 늙은 여자’라고 자조한다. 그렇게 체념하고 살다 손무한을 만나 설렘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정서에 공감하는 시청자들이 앞으로 점점 더 늘어갈 것이다.

 

《키스 먼저 할까요》는 고연령화 코드에 더해 이 시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문제까지 건드려 더욱 공감의 폭을 넓혔다. 10년 동안 안순진은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없고, 손무한은 울어본 적이 없다. 감정 없는 삶. 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상당수 사람들이 공허하고 쓸쓸하게 살고 있다. 그런 생활에 기적처럼 낭만이 찾아온다는 설정이 현대인에게 대리만족을 준 것이다. ‘살 만큼 살아서 아플 만큼 아파서’ 이젠 감성이 메마른 것 같지만 마음속 어딘가엔 안순진처럼 ‘사랑받고 싶어요 나두’라는 욕망이 사람들에게 있다는 점을 《키스 먼저 할까요》의 인기가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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