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돈①] 돈과 정치 그리고 ‘바보 노회찬’
  • 이민우·김종일 기자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8.07.27 13:33
  • 호수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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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진보정치인으로 산다는 건?…노회찬 통해 본 현실

 

한 정치인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도 빈소와 시민분향소에는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10여 년 전 산 양복을 입고 환하게 웃는 영정 사진 속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척박했던 한국 정치에서 진보운동의 씨앗을 뿌렸던 그였다. 거대 재벌의 유혹을 뿌리치고 ‘떡값 검사’ 실명을 공개해 정치적 시련을 자초했던 바보였다. 고(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얘기다.

 

노 의원의 비극은 단순히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가장 깨끗했고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웠던 정치인조차 돈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의 정치 현실을 보여줬다. 노 의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돈과 관련돼 있었다. 

 

구체적인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는 마지막 고백을 통해 ‘어리석은 선택’을 시인했다. 경제적공진화모임(경공모)으로부터 400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수치심의 크기가 목숨을 던질 만큼 컸던 것일까. 

 

4000만원. 누구에겐 ‘떡값’ 정도로 치부되고, 누구에겐 목숨을 걸 만큼 큰 금액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이 건넨 후원금이 자신의 정치 인생을 비극으로 이끌 것이란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어떤 압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법안조차 스스로의 힘으로는 발의할 수 없는 소수정당의 원외 정치인이었기에 더욱 순수한 후원금으로 여겼을 것이다. 주행거리 40만km를 훌쩍 넘겨버린 쏘나타 차량은 그 돈이 개인 안위를 위해 쓰였다고 생각하기 힘들게 만든다. TV를 사는 게 사치라고 여겨 누가 쓰다 버린 TV를 주워왔고, 상인에게 샀던 구두를 해질 때까지 신고 다녔던 그였다. 계절마다 늘 같은 양복을 입어야 했던 그는 왜 그리 큰돈을 받고 부끄러워해야만 했을까.

 

© 연합뉴스



깨끗함을 자랑했던 노회찬마저 힘들게 한 것은?

 

노 의원의 정치 인생은 부침을 거듭했다.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대책본부, ‘국민승리 21’ 등에서 활동하던 그의 인생이 바뀐 시점은 2004년이었다. 토론회에서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을 구우면 고기가 시커메진다”며 민주노동당 바람을 만들게 했고, 비례대표 후보 8번이었던 자신을 원내에 진입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노 의원 스스로 “살아생전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고 할 정도였다. 노 의원은 2005년 8월 ‘삼성 X파일’ 사건과 관련해 이른바 ‘떡값’을 받은 검사 명단을 공개해 주목 받았다.

 

민주노동당 내부 노선 갈등을 겪던 노 의원은 2008년 2월 탈당한 뒤 진보신당을 창당했지만, 4월 총선에서 낙선의 쓴맛을 봤다. 2010년엔 서울시장에 도전했지만 3위로 떨어졌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야권연대 대표 후보로 서울 노원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듬해 ‘삼성 X파일’ 사건의 사법 판단이 마무리되면서 또다시 의원직을 잃었다. 2016년 창원으로 내려가 3선에 성공했다.

 

어렸을 적부터 반(反)유신 투쟁에 나서고, 전기용접공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해 정치인이 됐다는 인생 역정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진보정당에서 보기 힘든 3선의 국회의원이지만, 의원직을 수행한 시간은 불과 7년에 불과했다. 2004년 이후 15년의 세월 속에서 그는 8년을 원외 정치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 기간 동안 당 대표 등을 맡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100여만원이 조금 넘는 활동비뿐이었다. 그 돈조차 노동자들과 백반을 먹고 당원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데 대부분 써야만 했다. 매월 30만원만 꼬박꼬박 갖다 달라는 아내의 바람은 끝내 들어주지 못했다.

 

누군가 그랬다.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계속하려면 애초에 재산이 많거나 학맥·인맥이 좋아야 한다고. 노 의원은 다행히도 후자에 속했다. 경기고·고려대 출신이었기에 지인들로부터 후원금을 조금씩 받아 정치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진보정당의 정치인 대부분이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 활동을 하다가 정치인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돌아갈 직장도 없었다. 소수의 대중 정치인에 의존하는 탓에 정치활동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노 의원뿐 아니라 진보정당의 정치인들은 지인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돈으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얘기였다. 

 

의원 시절이라고 해서 살림살이가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흔히 정치인들이 세비를 반납하겠다는 ‘퍼포먼스’를 할 때, 노 의원은 그럴 수 없었다. 매월 국회에서 나오는 월급통장엔 850여만원이 찍히지만, 정의당에 매달 납부한 특별당비만 220여만원에 달했다. 시민사회단체나 장애인단체에 다시 후원하는 금액은 100만원을 훌쩍 넘겼다.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파업 현장을 찾을 때는 그냥 돌아올 수 없어 조금씩이라도 꼭 후원을 해야만 했다. 

 

1억5000만원의 후원금도 있었고, 의원실 운영경비도 있었다. 대중적 인기 덕분에 후원금은 어렵지 않게 모았지만, 의원실은 늘 허덕였다. 국회에서 청소노동자들과 도시락을 먹는 데도 수십만원을 지출해야만 했다. 당원들이나 유권자들을 만날 때도 얻어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떤 정치인이 기업가들을 만나 호텔 밥을 얻어먹을 때, 더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 막걸리를 사면서 살림살이를 걱정해야만 했다. 정치후원금이 부족해지면 대출금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다음 해 정치후원금을 모아 대출을 갚으면 그해 다시 대출금이 커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7월24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빈소에 일반 조문객들이 줄지어 조문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진보진영에는 제2, 제3의 노회찬이 있다

 

노 의원은 근래 여러 명의 동지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1980년대 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시절부터 정책을 맡아 늘 함께했던 ‘영원한 정책국장’ 이재영씨는 201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노 의원은 자신의 빈소가 차려졌던 바로 그곳에서 몇 해 전 동지를 잃고 오래도록 자리를 지켰다. 진보신당 당 대표 시절 언론국장을 맡았던 당직자도 2014년 아홉 살배기 아들만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작년엔 진보정당의 영원한 조직가이자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오재영씨가 심근경색으로 곁을 떠났다. 모두 과로와 생활고에도 활동을 이어온 이들이었다.

 

노 의원은 이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편에 속했다. 진보정치의 상징성을 보유한 덕분에 사람들의 관심도, 지인들의 도움도 많았다.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약했던 한 진보정당 의원은 원내에 있던 시절 정치후원금을 다 채우지 못했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노동조합의 조직적인 정치후원금을 모았던 덕분에 절반 정도를 모았다. 나중엔 보좌관들마저 대출을 얻어 의원실 운영비로 쓰는 상황에 몰렸다. 이 의원은 나중엔 두 아들의 대학등록금을 내기 위해 돈을 빌리러 다녀야만 했다. 하지만 대출 한도가 꽉 찼던 탓에 결국 큰아들을 군대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국회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에게는 그마저도 사치였다. 도저히 출마를 꿈꿀 수 없는 이들은 당직자로 들어가 무명의 활동을 택했다. 당에서 나오는 월급이라도 받아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나마 당직자 월급은 조금씩 현실화됐다.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 80만원에 불과하던 기본급은 진보신당에 와서 120만원으로 올랐고, 정의당에선 최저임금 수준을 보장해 주고 있다.

 

정의당에는, 소수정당에는 제2, 제3의 노회찬이 있다. 수십여 명의 지역 활동가들이다. 선거 때마다 낙선할 줄 알면서도 당을 위해 출마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활동비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중앙당에서 지역으로 내려오는 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한 탓이었다. 누군가는 전문직 배우자의 수입으로, 누군가는 유명한 책을 써서 인세로 버틸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선거 때마다 당원들이 1만~2만원씩 모아준 특별당비로 어렵사리 선거를 치렀다. 그래야만 당 이름과 정책을 알릴 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버티는 이들이었다. 

 

진보정당 활동가들에게 빈곤은 지속적이며 끈질기고 집요하게 이어진다. 감히 한국 정치에서 진보를 표방할 거면 각오하라는 듯이. 이들에게 선택지는 단 두 가지다. 활동을 계속하며 빈곤에 적응하거나, 활동을 포기하는 것이다. 활동을 지속할 결심이 선 뒤엔 가난을 수용하고 적응하며 살 수밖에 없다. 여기엔 노하우도 없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를 포기해야 하고, 세상을 달관해야만 한다. 아무리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소신이 강하더라도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노 의원의 빈소에서 만난 한 지역 활동가는 하염없이 흐느끼며 이렇게 말했다.

 

“노 대표(노 의원)가 올해 초 지역에 와서 강연할 때 강연비 10만원을 모아서 줬는데, 그 돈을 나한테 활동하는 데 쓰라고 돌려주더라고. 그 돈 안 받고 후원이라도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보정당 운동 하지 말걸 그랬어. 다들 차라리 이기적으로 살지. 다 제 밥벌이는 해 먹고 살았을 거 아냐.”

 


이들을 옭아매는 도덕적 결벽성의 굴레

 

사람마다 느끼는 수치심의 크기는 다르다. 노 의원은 자신이 고교 동창으로부터 받은 돈이 ‘드루킹’과 연관된 자금이었다는 걸 뒤늦게 안 것 같다. 유서에서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라고 언급한 대목은 4000만원 수수를 시인하면서 그 배경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며 자신이 느꼈던 수치심의 크기를 대변했다.

 

경제적 빈곤과 함께 진보정치인들에게 강요되는 것이 도덕적 결벽성이다. 진보정치의 도덕적 우월성은 기존 정치의 부패를 비판하며 성장해 온 탓에 스스로를 가두는 벽이었다. 때때로 개인의 일탈이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혀 진보진영에 대한 신뢰를 크게 흔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10여 년 전 당직자의 유흥업소 출입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성기를 달리던 진보정당을 좌초시킨 일이 있다. 그 사실이 당 내부 자체 감사에서 밝혀진 일이라는 사실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진보정치의 도덕적 우월성에 치명상을 입혔을 뿐이었다.

 

노 의원이 걱정한 것도 이 대목일 것이다. 4000만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 자금에 대가성이 있었는지 여부는 어차피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믿었던 진보정치인마저 검은돈을 받았다는 ‘사실’만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당을 생각했다. 정의당에서 보수진영을 비판할 때도, 대안적 정책을 발표할 때도 자신의 과오가 발목을 잡을 것이라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유서를 통해 마지막으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린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함축된다.

 

노 의원의 빈소에는 시민 2만여 명의 발길이 이어졌다. 빈소를 찾은 시민들은 금품 수수 사실을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 의원에 대한 추모 열기엔, 훨씬 많은 부정한 돈을 받고도 부끄러움은커녕 멀쩡하게 사는 정치인들이 많다는 국민 정서가 깔려 있다. 반면 노 의원에 대해선 수치심으로 인해 스스로 삶을 마감한 고인을 안타까워하는 동정론이 두드러진다. 빈소에 남겨진 한 시민의 손편지에는 “재정적 후원마저 지지의 몫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진작에 후원을 좀 제대로 할걸…”이라는 회한이 담겨 있었다. 

 

노 의원의 비극은 이중적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남한테 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자신에겐 관대했던 진보진영의 일부 정치인들에겐 도덕적 우월감의 허상에서 깨어나라는 경고다. 또한 진보정치인도 평범한 사람이고,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

 

그동안 너무나 쉽게 정치를 ‘봉사’라고 말했다. 세상을 바꾸는 정치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희생과 선의에 기인해야 한다고 했다. 국회의원의 세비를 줄이고 특혜를 줄이라고 하면서도, 언젠가는 좋은 정치인이 나타나리라 기대했다. 마치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지금까지 좋은 정치인이 있었지만, 그들을 지키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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