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도는 靑③] ‘책임총리·책임장관’? 국정운영 현실과 거리 멀다
  • 신현기 가톨릭대 행정학과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17 14:25
  • 호수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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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통제 위한 ‘청와대 집권화’, 현실정치의 관점에서 봐야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 중 하나는 “대통령밖에 안 보인다”는 것이다. 취임 이후 줄곧 적폐청산 등을 명분으로 대통령이 국정 전면에 나서면서 총리도, 장관도 그리고 여당도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가령 최근 폭염으로 인한 전기료 폭탄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대통령이 직접 나서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이 정도 사안이면 관계부처 장관이 직접 챙기는 게 맞는데, 이런 것까지 대통령이 챙기면 장관들의 존재감은 사라진다. 

 

그런데 관계부처가 내놓은 전기료 인하 대책은 국민 기대에 한참 못 미쳤고, 그 여파로 대통령의 지지율은 하락했다. 이처럼 대통령이 국정 전면에 나설 경우 국민들의 불만은 고스란히 대통령에게 쏠림으로써 오히려 대통령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청와대 정부’라는 비판

 

정치학자 박상훈 박사는 이런 식의 국정운영을 ‘청와대 정부’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가 말하는 ‘청와대 정부’는 대략 두 가지 정도의 함의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청와대 정부’는 대통령이 의회·정당 등 기존 정치제도를 거치지 않고 대중들과 직접 소통하는 ‘대중 동원식’ 국정운영 방식을 말한다. 대통령이 공식 제도를 우회해 대중과 직접 관계를 맺고, 여론의 지지를 국정운영의 압력 수단으로 삼을 경우 시민의 대표를 통해 통치하는 대의정부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시민사회를 대통령의 지지자와 반대자로 분리함으로써 시민사회 내부의 분열을 가속화할 수 있다. 

 

2017년 6월9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동연 경제부총리(왼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둘째, ‘청와대 정부’는 대통령이 국정의 모든 사안을 직접 챙기면서 대통령 주변, 즉 청와대로 인력과 권한이 집중돼 내각·여당 등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국정운영을 말한다. 이는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이 국정을 주도하고 다음 선거에서 그 성과에 대해 심판받는 정당 책임 정부의 원칙에 어긋난다. 무엇보다 총리도, 장관도, 여당도 청와대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문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책임총리 또는 책임장관 공약을 껍데기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청와대 정부’의 대안은 청와대를 슬림화하고 국정운영의 권한과 책임을 내각과 여당으로 분산해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이 공통적으로 청와대 중심의 국정운영을 하다가 실패했다는 역사적 경험을 고려할 때, 매우 그럴싸한 대안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여당의 역할을 강조하는 정당 책임 정부, 그리고 내각의 역할을 중시하는 책임총리 또는 책임장관은 원리적으로는 옳지만, 실제 국정운영의 현실과는 일치하지 않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대통령의 고민이 무엇인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박 전 의원에 따르면, 청와대의 한 인사는 “대통령 말도 안 듣는다” “자료도 안 내놓는다” “조직적 저항에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 정부 부처가 사보타주(태업)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른바 정부 관료제의 저항인데, 이런 저항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국정목표를 달성할 것인가는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이 공통적으로 부닥친 문제였다. 특히 정책의 이념적 성격과 관련 없이 기존 정책으로부터 급격한 이탈을 시도하는 대통령일수록 더욱 강한 관료 저항에 부닥치곤 했다. 이때 대통령이 활용할 수 있는 관료 통제 수단은 ‘정치적 임명(political appointment)’과 ‘집권화(centralization)’ 두 가지다. 

 

먼저 정치적 임명은 내각의 중요 자리를 대통령 측근으로 임명함으로써 관료제를 통제하는 방식이다. 미국 대통령 사례를 보면 카터·레이건 등은 정치적 임용을 통해 내각을 통제했다. 카터 대통령은 정부 고위직 중 정치적 임용이 가능한 직위, 이른바 SES(Senior Executive Service) 직위를 신설했는데, 이는 정부 고위직에 대통령 측근을 임명함으로써 내각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연방정부의 대폭적 축소를 시도했던 레이건 대통령 역시 행정부 예산 등을 통제하는 관리예산처(OMB) 책임자에 최측근을 임명함으로써 관료 조직의 저항을 통제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오랜 엽관제(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사람·정당이 관직을 지배하는 정치적 관행)의 전통 때문에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임용의 폭과 깊이가 상당하다. 이에 비해 한국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임용할 수 있는 정무직은 법률적으로 채 130석이 안 된다. 이 정도 정무직으로 행정부의 거대 조직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 대통령은 정치적 임명보다는 청와대 주변으로 권한과 인력을 집중시키는 집권화를 선호한다. 이는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청와대는 대통령의 비서 기능과 국정운영 기능을 모두 수행하지만, 미국의 경우 비서 기능은 백악관이 맡고 국정운영에 필요한 인사·예산·법률 사항 등은 대통령 부서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 집행부(EOP)에 집중돼 있다. 이 부서는 1939년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고, 이후 대통령의 역할이 커지면서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그리고 관료제에 대한 불신이 컸던 닉슨 대통령 때 OMB가 EOP 내에 신설되면서 행정부의 조직·인사·예산 등을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됐다. 이는 미국 대통령의 경우에도 관료제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임기 내에 국정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통령 주변으로 권한을 모으는 집권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관료 저항을 어떻게 극복할까

 

이른바 ‘청와대 정부’는 정당 책임 정부라는 현대 대의정부의 운영원리에는 맞지 않지만 제한된 임기 안에 국정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대통령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관료조직의 저항, 여당의 비협조, 의회관계의 비예측성, 여론의 비일관성 등 대통령이 재임 중 부닥치는 온갖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대통령 주변으로의 집권화는 대통령에게 어쩌면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책임총리와 책임장관을 세우고 여당과 함께 의회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현실정치 관점에서 현실적이지 않고,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의 이해에 부합하지 않는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부통령에서 갑자기 대통령이 됐다. 문 대통령도 전임 대통령의 탄핵으로 갑자기 대통령이 됐다. 트루먼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1952년 대선은 공화당 후보였던 아이젠하워의 승리가 거의 확정적이었다. 자신의 후임자가 될 아이젠하워를 생각하며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가 이 자리에 앉게 되겠지. 그는 이렇게 말할 거야.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적폐청산을 들고 국민의 선택을 받았던 문 대통령도 청와대 안에서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이는 민주화 이후 대통령의 공통된 고민이었다. 현실정치의 관점에서 청와대 정부는 바람직하지는 않더라도,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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