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적어도 동대문에선 불황을 논할 수 없다"
  • 조문희·오종탁 기자 (moonh@sisajournal.com)
  • 승인 2018.11.2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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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삶의 현장’ 방불케 한 동대문 사입 시장

 

코끝에 찬바람이 스치기 시작한 11월 초입. 해가 지자 건물 사이로 바람이 거세게 들이쳤지만 옷을 여미는 사람은 없었다. 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검은 짐을 한 보따리씩 들고 있거나 어린아이 몸집만한 캐리어를 끌고 다녔다. 시계 바늘이 밤 12시를 가리키는데도 골목 사이엔 사람들과 차와 짐들이 한 데 엉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길 한복판에선 삼삼오오 모여 앉은 이들이 초록색 만원 지폐 수십 장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11월1일 시사저널이 목격한 서울 동대문 도매의류 ‘사입(仕入·구매)’ 현장의 모습이다. 활기가 넘치던 동대문의 밤은 ‘불황’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DDP 패션몰 앞에 '미송' 잡은 물건들이 가득 놓여 있다. ⓒ 시사저널 오종탁·조문희


“자영업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경기 악화와 최저임금 인상 여파로 자영업이 위태롭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업종도 있다. 의류업이 대표적이다. 의류업은 온라인 쇼핑몰을 매개로 국내외 불특정 다수에게 상품을 판다. 특히 한류 영향으로 중국에서 한국 옷을 구입해 파는 사례가 늘고 있다. 상품을 고르는 안목, 디자인 능력에 따라 의류 사업자는 고부가가치와 매출 수직상승 등을 경험할 수 있다.

 

의류업종 창업의 첫 관문이 바로 동대문 의류 시장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DDP)을 중심으로 형성된 1.3km 길이의 이 시장은 매일 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도·소매 의류 상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불야성을 이룬다. 대한민국 패션의 메카라고 불리는 이곳에선 매일 수만 건의 거래가 이뤄진다. 숨겨진 노다지를 찾기 위한 자영업자들의 노력과 열망이 정직하게 분출되는 공간인 셈이다.

 

그러나 동대문 시장을 처음 찾는 이들은 이곳 특유의 분위기에 압도당하기 일쑤다. 상인들끼리 쓰는 전문 용어가 암호처럼 어렵게 들릴뿐더러 커다란 건물 안에서 길을 잃기도 쉽다. 시사저널은 의류업종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에 빙의(憑依)해 이곳 현장을 직접 돌아봤다.

 

쇼핑몰 안 상점들마다 커다란 봉투가 놓여있어 이동하기 힘들었다. ⓒ 시사저널 오종탁·조문희


‘미송·장끼·장차’…외계어가 들렸다

 

본격적으로 쇼핑몰 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건물 입구에선 건장한 체격의 ‘사입 삼촌’들이 커다란 비닐봉지를 어깨에 이고 바삐 왔다 갔다 했다. 사입 삼촌은 소매업자들의 도매의류 구매를 대행해 주는 사람들이다. ‘장차’로 불리는 커다란 버스도 줄이어 세워져 있었다. 지방 상인들이 이용하는 전세 버스였다. 밤 11시40분 즈음 한 버스에선 상인 십 여명이 왁자지껄 웃으며 내려왔다. 밍크코트를 두른 중년의 여성부터 마스크로 무장한 젊은 커플까지 나잇대는 다양했다.

 

도매 의류 쇼핑몰 중 하나인 DDP 패션몰 안으로 들어가니 각 매장 앞에 의류 봉지들이 수두룩했다. 봉지 위엔 상품을 받을 소매업체 이름과 지역명이 쓰여 있었다. 청주·서산·김천·광주 등 국내는 물론 베이징·​홍콩 등 해외 도시명도 보였다. 기자들과 동행한 이현목 카페24(전자상거래 플랫폼 업체) 과장은 "전문 용어로 '미송(미리 송급) 잡았던' 물건들"이라고 설명했다. 물건이 빠지기 전에 선금을 내고 미리 확보해 놓은 물량을 말했다.

 

곳곳에 쌓인 봉지 더미 때문에 쇼핑몰 통로는 비좁았다. 가까스로 걷다 보니 중국어가 심심찮게 들렸다. 한 중국인 보따리상이 "피앤이디알바(便宜点儿吧, 좀 깎아주세요)"라며 흥정하자 도매상인은 익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계산기를 다시 두드려 보여주더니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종이의 정체는 ‘장끼’였다. 장끼는 영수증을 뜻하는 일본어다. 동대문에는 이렇게 일본어와 상인들의 은어가 뒤섞인 말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기자가 장끼를 직접 떼어 봤다. 누가봐도 풋내기였다. ⓒ 시사저널 오종탁·조문희

 

"삼촌, 이 조끼패딩이랑 코트 '깔'(색깔의 줄임말)별로 해서 장끼 좀 떼줘봐요" 기자도 용기내서 장끼를 떼봤다. 누가 봐도 뜨내기다. 시큰둥하게 쳐다보던 젊은 도매상인은 장끼를 내어줬다. 장끼는 다용도다. 기본적으론 가격 견적을 나타내는 종이다. 우선 색깔별로 1~2장씩 구매해 갔다가, 반응이 좋으면 다시 와서 대량으로 사가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동대문 도매 매장 중 봐뒀던 곳을 찾아갈 수 있는 좌표도 장끼다. 물건을 구매한 뒤론 세금계산서 역할까지 한다. 예전에는 이런 '전문 용어'를 모르면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요즘엔 젊은 도매상인과 중국인 손님이 늘어나면서 일상용어를 써도 크게 문제는 없다고 한다.

 

 

중국인 업고 QR코드까지…발전하는 동대문

 

동대문에는 DDP 패션몰을 비롯해 APM, 청평화, 디오트, 테크노 등 다양한 의류 도매 쇼핑몰이 심야영업 중이다. 오후 8시에서 자정까지 영업 개시 시간은 제각각이다. 쇼핑몰마다 특색이 있다. 국내 온라인 쇼핑몰 사업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곳은 청평화, 디오트 등이다. 중저가에 가성비(가격 대비 품질) 좋은 의류 상품을 선보인다. 

 

중국인 소매상들은 가격대가 높은 DDP 패션몰, APM 등에 많다. 중국이 한국보다 옷값이 쌀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APM 앞에서 만난 한 중국인은 "한국에서 옷이 훨씬 싸고 디자인도 좋다"며 "여기서 옷을 5만원 정도에 떼가면 중국에서 10만원 이상에 팔수도 있다"고 밝혔다. '큰 손' 중국인 보따리상들은 어느새 동대문 의류 도매 쇼핑몰의 주요 고객이 됐다. 국내 소매상인보다 모바일 쇼핑, 결제 등에 능한 이들을 위해 QR코드를 도입한 쇼핑몰도 있다.

 

최근 동대문 의류 도매 쇼핑몰에선 중국인 관광객과 상인을 위한 QR 코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QR 코드로 접속하면 해당 상점의 물건을 살펴볼 수 있다. ⓒ 시사저널 오종탁·조문희


 

소매상인들은 본인이 판매하려는 의류의 콘셉트, 가격 등에 따라 단골 쇼핑몰을 정한다. 또 쇼핑몰 주변엔 의류 제조공장이 즐비하다. 이현목 과장은 "이 근처에 디자인에서 생산까지 가능한 크고 작은 공장 수백여개가 있다고 들었다"며 "제조, 도매 등이 일원화한 동대문에선 1주 아니면 2주마다 신상품이 들어온다. 패션 트렌드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라고 말했다. 

 

쇼핑몰 앞 거리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줄지어 앉아있다. 그중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온 한 여성은 '장끼'로 불리는 영수증을 가득 받아왔다. ⓒ 시사저널 오종탁·조문희



불황에도 온라인 쇼핑은 ‘황금기’

 

'요즘 잘 팔리는 옷'을 찾아내는 것은 소매상 개개인의 능력이자 사업 성패를 결정짓는 요인이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잘 나가는 쇼핑몰들은 대부분 이 냄새를 기막히게 맡는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타이밍을 놓치면 옷을 구하지 못하는 일도 많다. 국내 최고 온라인 의류 쇼핑몰 '스타일난다'의 김소희 대표는 사업이 크게 성공한 뒤에도 직접 동대문 도매상들을 찾아 트렌드를 파악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끊임없이 공부하고 발품 팔아 연 수십억~수백억대 매출을 올리는 온라인 쇼핑몰이 수두룩하다.

 

온라인 쇼핑몰 성업에 힘입어 올해 3분기 온라인쇼핑 거래액은 28조727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0% 증가했다. 온라인·모바일쇼핑 거래액은 2001년 통계 작성을 시작한 이후 꾸준히 최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으며, 올 3분기도 역대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덩달아 온라인 쇼핑 플랫폼을 지원하고 창업 솔루션도 제공하는 카페24 등 업체들도 바빠졌다. '동대문 도매의류 사입 특강'을 진행하는 업체도 많다. 적어도 동대문에선 자영업 위기를 논하기 힘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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