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설렁설렁’의 미학
  •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2.20 16:00
  • 호수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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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릴 지브란은 레바논 태생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활약한 시인이자 화가다. 12세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 아랍과 유럽 각국을 다니면서 여러 경험을 쌓았고 세계적인 조각가 로댕에게 미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아랍어로도 쓰였으나, 1923년에는 영어로 산문시 《예언자》를 발표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깊은 철학과 지혜가 담겨 있어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아왔다. 필자도 대학 시절 이 작품을 접하고 암송하던 구절이 몇 있다. 그중 ‘결혼’에 관한 부분을 소개해 보자. “서로 사랑하되, 사랑의 굴레를 만들지 마라. 그대들 영혼의 해안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가 있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 잔으로 마시지 말라. (중략) 신전의 기둥들은 서로 떨어져 서 있고 참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는 서로의 그늘 안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조금 거리를 두라는 말인데, 훗날 나름 관록이 붙은 회사원이 된 필자에게 이 구절은 다른 쪽으로도 해석되었다. 즉 일을 잘하려면 그 일에 너무 몰입하지 말고 조금 거리를 두고 하라는 말로 들렸다. 실제로도 그리하면 일이 더 잘되는 경우가 많았다. 골프도 그러하다. 한때 골프여제로 불렸던 소렌스탐은 드라이버를 칠 때 60~70%의 힘으로만 치면 가장 거리가 멀리 나가는 장타가 나온다고 했다. 골프 고수들의 어깨 힘 빼고 치라는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2: 다시 필자의 회사원 시절 이야기다. 1990년대 직장인들 사이에서 ‘멍부, 멍게, 똑부, 똑게’ 이야기가 회자되던 적이 있었다. 상사의 분류를 ‘멍청하고 부지런한’ ‘멍청하고 게으른’ ‘똑똑하고 부지런한’ ‘똑똑하고 게으른’ 형으로 나눈 것이다. 당시 동료들에게 어느 상사가 가장 기피하는 타입이냐고 물어보면 예상과 달리 ‘멍게’가 아니라 ‘똑부’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이유를 물어보면 ‘똑부’ 상사는 대부분 독선적이어서 아랫사람 말을 안 듣는 것은 물론, 부지런하게도 사사건건 간섭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데다, 지시대로 했다가 일이 잘못되면 ‘똑똑하게’ 부하 탓을 하며 면피를 잘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3: 시중에 돌아다니다 보면 많은 ‘설렁탕’ 또는 ‘설농탕’ 집이 보인다. 사전에는 “소의 머리, 내장, 족 따위를 푹 삶은 국”이라고 나오는데 ‘설렁탕’만 표준어로 인정된다. 그러나 그 유래를 들어 ‘설농탕’이 맞다는 목소리도 크다. 조선 시대에 봄이 오면 임금은 동대문 밖에서 선농단(先農壇)을 차려 풍년기원 제사를 올렸고, 제사 후에 백성들에게 소의 고기와 뼈를 곤 ‘선농탕’을 하사한 데서 이름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이 음식은 만주에서 왔으며, 그 탕의 만주어 이름인 ‘살룬 또는 살렁(salun)’도 같이 전래되어 ‘설렁’탕이 된 것이기 때문에 표준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탕의 이름을 반복한 ‘설렁설렁’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설렁탕과는 무관하게도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거나 움직이는 모양”이라고 나온다. 

ⓒ 청와대제공
ⓒ 청와대제공

요즘 한국 경제에 드리운 먹구름이 더 짙어지는 모습이다. 지난해 민간 소비가 7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는 것 외에는 고용 등 전반적인 경제 상황은 별로 나아지는 조짐이 안 보인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하반기부터 부쩍 정부, 청와대는 물론 집권여당에서도 ‘민생·경제 살리기’에 ‘최선’ ‘올인’ ‘총력’이라는 단어가 갈수록 더 자주 동원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단어가 자주 들릴수록 오히려 더 불안해지는 것은 왜일까? 혹시 작금의 경제 상황이 정부, 청와대, 여당이 이미 ‘똑부’로서 ‘열정’적으로 ‘나선’ 결과라 그럴까? 오늘도 필자는 설렁탕 한 그릇을 먹으면서 ‘설렁설렁’의 미학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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