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영화’라고? 《캡틴마블》을 보러 갔다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16 17:00
  • 호수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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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페미니즘 영화의 사례

주말에 영화 《캡틴마블》을 보러 갔다. 마블 영화를 도통 본 적도 없고 ‘슈퍼히어로물’에 관심도 흥미도 없는 내가 이 영화의 흥행에 보태주러 가고자 결심한 이유는 소위 ‘별점테러’ 때문이었다. ‘페미니즘 영화라서’가 그 이유라니, 얼마나 대단한 영화이기에 이 난리냐라는 호기심이 작동했던 것이다. 주인공 브리 라슨(비어스 역)이 개봉 전 이미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다”라고 한 것이 방아쇠였다는 말도 있지만, 수많은 소년들의 사랑을 받은 마블 시리즈가 여성 단독 주인공을 내세운 것부터가 불만의 요소는 아니었을까. 더구나 도무지 성적 코드라고는 없는 여주인공이다! 

결론은, 매우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페미니즘 영화였다. 영화를 볼 때 알면 더 재미있는 지혜로운 설정을 몇 가지만 나열해 보자. 

우선, 비어스는 푸른 피를 흘린다. 나중에 왜 지구인인 비어스의 피가 붉지 않았는지 이유가 나온다. 교관인 욘-로그가 자신의 피를 주입해 비어스를 살려냈기 때문이다. 이 설정은, 여성이 원래 생명인 붉은 피 대신 남성의 사고방식과 삶의 형식을 주입받아 산다는 것의 비유로 충분하다. 게다가 비어스는 무의식의 특정 기억만을 뽑고 거기 숨은 힘은 억제하려는 교관의 끊임없는 가스라이팅(반복적인 정신적 압력을 통해 여성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일)을 당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분노가 여성의 힘이고, 감정이 여성의 권력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연민과 사랑과 연대의 감정이 불러일으키는 불의에 대한 분노. 크리족이 바라는 것은 전쟁무기로 쓸 지식이지만, 그 지식은 댄버스의 내면에서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목적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영화 《캡틴마블》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캡틴마블》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스스로의 힘을 인식한 여성의 각성

또 있다. 여성 영웅도 남성 영웅과 마찬가지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그 어린 시절은 역경 그 자체보다는 “여자라서 안 돼”라는 편견을 극복하고 혼자 힘으로 일어서는 데 바쳐져 있다. 그리고 비어스가 캐럴 댄버스로 거듭나는 순간 역시 남성인 주드 로에게 “나는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비어스는 불타는 태양(버닝썬)처럼 뜨거운 광선으로 적을 제압하지만, 진짜 비어스의 힘은 스스로의 힘을 인식하는 데서 나온다. 

메갈리아 이후 다시 사회변혁의 중심에 서기 시작한 한국의 페미니즘은 이제 새로운 여성상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캡틴마블은 그 한 모델로서 손색이 없다.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안의 진정한 힘을 깨닫고 스스로 일어서는 여성, 내재된 힘을 끊임없이 억압하는 문화적 세뇌를 이겨내고 다양한 약자들, 심지어 고양이와도 연대 협력할 줄 아는 여성. 덧붙여 캐럴 댄버스의 두 주먹에서 발사되는 불기둥을 필자는, ‘장자연’ 사건과 ‘버닝썬’ 사건을 관통하는 오랜 성착취 악습을 겨냥하는 깨어남이라고 읽고 싶었다. 

세상의 변화를 가장 느리게 깨닫는 것은 언제나 기득권 언저리의 사람들이다. 캡틴마블을 단순히 재미있고 호쾌한 오락영화로 읽어내든가 또는 재수 없이 예외적인 ‘쎈 언니’ 이야기로만 읽어버릴 때 이제는 남성들이 제공한 이미지에 갇히지 않는 여성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놓치게 된다. 캡틴마블은, 지배하고 점령하려는 욕망에 불타는 크리족을 제외한 모든 우주의 평화공존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을 여성 영웅 한 사람에게 잘 버무려 넣은 맛있는 영화다. 영화 말고 현실의 크리족을 동경하는 분들, 줄 바꿔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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