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외교문서 공개…대선前 김현희 압송 작전 비화
  • 노진섭 기자 (no@sisajournal.com)
  • 승인 2019.03.3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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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전문에 “늦어도 12월15일까지 도착” 언급

 

1987년 11월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우고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KAL) 858편 비행기가 인도양 부근에서 실종됐다. 결국 비행기는 폭파된 것으로 판명 났고, 그 범인으로 지목된 북한 공작원 김현희는 12월15일 한국에 압송됐다. 이날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전두환 정부가 KAL 858기 폭파사건을 대선에 이용하려 했던 정황은 2006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공개한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북괴음모 폭로공작(무지개공작)' 계획 문건 등에서 이미 사실로도 확인된 바 있다. 

이 사실은 1987~88년 작성된 외교문서에서 재확인됐다. 외교부는 3월31일 30년이 지난 외교 문서 1620권(25만여 쪽)을 일반에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문서에는 △88서울올림픽대회 개최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 △노태우 제13대 대통령 취임식 △남극기지 설치 △1978 한·일 대륙붕 협정 등이 포함돼있다. 

연합뉴스=1987년 12월15일 김포공항으로 압송된 김현희
연합뉴스=1987년 12월15일 김포공항으로 압송된 김현희

 

특히 KAL 858기 폭파사건 범인 김현희를 국내로 데려오기 위한 외교 교섭 과정이 문서에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당시 정부는 김현희가 잡혀있던 바레인에 박수길 외교부 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했다. 박 차관보는 1987년 12월10일 외교부로 보낸 전문을 통해 "늦어도 15일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12일까지는 바레인 측으로부터 인도 통보를 받아야 한다"고 보고했다. '늦어도 15일까지 도착'이라는 표현은 다분히 대선(12월16일)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바레인은 김현희를 현지 시각으로 12월13일 오후 8시 "(한국으로) 이송한다"고 우리측에 통보했다. 대선 이틀 전인 12월14일 오후 2시 서울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출발 5시간 앞둔 12월13일 오후 3시(현지 시각), 바레인 내무장관은 현지에 있던 박 차관보에게 전화해 '이유는 밝힐 수 없다'면서 이송계획을 24시간 연기한다고 통보했다. 이에 박 차관보는 "인수를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한 시점에서 계획 변경은 커다란 충격"이라고 외교부에 전했다. 

대선 전에 김현희를 데려온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박 차관보는 외교부에 미국을 의심하는 전문을 보냈다. 그는 "마유미(김현희)의 인도에 관한 미국의 입장이 미묘한 것으로 생각된다"며 "마유미의 인도가 선거 이후로 되도록 미국이 바레인 측에 작용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니 마유미 인도 문제와 관련해 미국 측에 너무 소상한 정보를 주지 않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고 보고했다.

김현희를 대선 전에 반드시 압송하겠다는 정권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정부는 다방면으로 외교력을 동원했다. 주사우디 대사에게 사우디 정부에 연락해 바레인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하고, 바레인 고위직들과 친분이 있는 한일개발 조중식 사장과도 접촉하라고 지시했다. 

이 와중에 바레인 산업개발부 차관은 '일본이 다시 관할권 문제를 제기한 것 같다'고 얘기했다. 일본은 김현희가 일본 위조여권을 소지했다는 점을 들어 신병 확보에 관심을 보였다. 1987년 12월2일 주일대사가 외교부에 보낸 당시 전문을 보면, 주일대사관의 박련 공사는 도쿄에서 후지타 일본 외무성 아주국장과 만난 자리에서 "아국(한국)은 사고 비행기의 소속국으로서 신병 인도에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후지타 국장은 "(김현희 등이) 일본의 위조여권을 갖고 있음에 비춰 (용의자) 2명의 국적 등 신원 확인 문제를 일본이 우선 책임을 가지고 신속히 해결해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박련 공사는 전문을 통해 "한일 간에 신병 인도 문제를 놓고 경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정부는 여러 경로로 일본을 압박했고, 결국 일본은 12월7일 바레인 정부에 '바레인이 김현희를 한국 정부에 인도하기로 결정하면, 최대한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통보했다. 또 한국 정부에 "한국과 신병 인도를 둘러싸고 경쟁할 의도가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김현희는 대선 전날인 1987년 12월15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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