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있는 아내’라는 코르셋을 벗자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13 17:00
  • 호수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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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도 부동산 투기를 할까②

지난주 이 지면에서 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신비’는 도대체 어디까지 걸쳐 있는 걸까?”라고 탄식했다. 페미니즘에 눈뜬 젊은 세대와 달리, 나와 같은 중년 이상의 여성들에겐 여전히 가부장제의 자장이 강고한 힘을 발휘한다. 안타깝게도 베티 프리단적 의미의 ‘여성의 신비’와는 또 다른 방식의 신화가 우리 사회에 퍼져 있다. 대체로 중산층 주부들에게 들씌워진 채 다양한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그 신화는 바로 ‘능력 있는 아내’라는 신화다. 재개발지역에 건물 사는 것이 문제라고 말은 하면서도 아내가 ‘남편 몰래’ 바로 그 ‘투자’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는 남편들이 너무 많은 데 놀랐다. 오히려 그런 아내를 ‘능력 있는 아내’라고 부르며 부러워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 신화는 태어나고 자랐다.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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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뚤어진 가족 이데올로기 속 ‘엄마’와 ‘아내’

부동산 불리기에 성공하는 ‘능력 있는 아내’를 향한 열망에는 반드시 짚어야 할 비극적 지점이 최소 세 군데나 있다. 하나는 자녀를 교육하고 노후를 대비하는 데 사회안전망 아닌 개인적 차원의 부동산이라는 불로소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 다른 하나는 집을 먹고 자고 웃고 우는 생활의 터전이 아니라 사고팔며 값이 오르고 이사를 다니며 액수를 불려나가는 재물로 바꿔버린 일. ‘집’이 부동산(재물)으로 변함에 따라 실제의 집 대신 엄마라는 가상의 집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더 강고해지는 역설. 이상교육열의 중심에도 엄마, 부동산 투기의 중심에도 엄마. 심지어 이 엄마에게 능력을 발휘할 여유를 제공하기 위해서 가사노동을 대신해 줄 ‘다른 엄마’가 필요하다. 

이 ‘다른 엄마’들은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된 가사노동 비용을 벌어들이며 ‘무능력한 아내’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할 때가 많다. 중산층 아내·엄마가 내 부동산 불리기에 뛰어드는 일은 ‘내 집 마련’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다른 아내·엄마로부터 집을 더 멀리 밀어내고 생존의 위기 앞에 서게 한다. 이중의 억압이고 착취다. 남편의 지위와 권력이 곧바로 아내의 “남편 몰래 뭐든 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그 기반을 잘 이용해 오로지 내 가족의 안녕을 위해 온갖 탈법, 편법을 불사하는 것이 아내이자 엄마의 능력이 된다는 것은 참혹한 일이 아닌가. 

지인 한 분은 이러한 한국 사회를 가리켜 “가족 이데올로기가 더러운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가부장제 아래서 ‘능력 있는 아내’라는 말은 결국 가족이기주의의 화신이 된다는 말일 공산이 크다. 자본주의가 점점 잔인해지는 세상에서 ‘능력 있는 아내’라는 말은 남편을 대신해서(모르게) ‘손에 피 묻히는 아내’라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것은 그 아내들이 만든 신화가 아니다. 우리 세대의 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면 세상이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 다 하는 방식대로 자녀와 남편을 사랑하는 일로부터 좀 물러설 필요가 있다.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지속적으로 차별을 만들어내는 각자도생의 재테크에 골몰하는 대신, 여성 노동에 지불되는 임금을 높이고 가사노동의 가격을 그 가치에 걸맞게 책정하는 데 힘을 보태고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가족 이데올로기를 해체해 다양한 가족을 구성하는 일을 하는 것이 나와 내 자녀들에게 훨씬 유익하다는 것을 ‘행복’의 이름으로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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