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간 ‘임실치즈의 代父’ 지정환 신부
  • 전북취재본부=정성환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26 10:24
  • 호수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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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 두 마리로 국내 치즈 생산 시작…반독재 민주화투쟁에도 앞장

임실치즈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지정환 신부(벨기에 이름 디디에 세스테벤스·88)가 4월13일 오전 전주의 한 병원에서 숙환으로 영면했다. 정부가 추서한 국민훈장 모란장을 전하기 위해 4월15일 오후 빈소가 차려진 전주 중앙성당을 찾은 이개호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지 신부를 ‘6차 산업 선각자’ ‘실천적 지식인’이라고 정의했다.

임실치즈축제에 참석한 지정환 신부(앞) ⓒ 임실군
임실치즈축제에 참석한 지정환 신부(앞) ⓒ 임실군

1931년 벨기에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지 신부는 1959년 12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 왔다. “전쟁의 땅이 희망을 품게 하자”는 이유였다. 1961년 첫 임지인 전북 부안성당에 부임한 뒤 농민과 함께 3년간 간척지 100ha(1㎢, 30만 평)를 조성해 농민 100여 명에게 나눠줬다. 1964년 두 번째 임지인 임실에서는 가난이 일상이 된 농민들과 만났다. 그는 궁리 끝에 완주 삼례의 오기순 신부가 선물한 산양 2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산양유로 치즈를 생산해 농민들의 가난을 떨치고 자활 기반을 마련하자는 생각에서다. 3년의 실패 끝에 1969년 포르살뤼·체더·모차렐라 등 다양한 치즈 개발에 성공했다. 한국에서 만든 최초의 치즈였다. 농민들이 정성껏 만든 임실치즈는 ‘신선하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당시 국내 최대 호텔인 조선호텔에 납품됐다. 

지 신부는 1972년 6월, 목표했던 치즈 생산을 이루자 대가 없이 임실치즈공장의 운영권·소유권을 주민협동조합에 전부 넘겼다. 한학에 밝은 그의 퇴진 변(辯)은 ‘공수신퇴(功遂身退)’였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공(功)이 이뤄지면 몸(身)은 물러난다는 뜻이다.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없어요. 공을 이뤘으면 이내 물러나야 합니다.”  

그는 시대의 불의에 맞서기도 했다. 1970년대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엔 외국인 사제들과 민주화투쟁에 나섰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엔 우유 트럭을 몰고 광주에 가기도 했다. 지 신부는 1984년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인 ‘무지개의 집’을 설립해 장애인 자활에도 힘썼다. 이 공로로 2002년 호암재단으로부터 사회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상금 1억원을 쾌척해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장애인과 그 가족들을 돕는 데 헌신했다. 2004년 사제직에서 은퇴한 뒤 2016년 한국 국적을 취득해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거주해 왔다. 지난해에는 정부에 창성창본을 신청해 ‘임실 지씨’의 시조가 됐다.

지 신부의 빈소가 차려진 전주 중앙성당에는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심민 임실군수는 “임실로서는 그분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며 “그의 발자취와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전시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기봉 임실치즈마을 운영위원장은 “지 신부의 최종 선물(목표)은 치즈가 아니었다. 치즈로 임실에서 가난을 물리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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