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이라는 이름의 인문학
  • 하창수 작가·《라면에 관한 알쓸신잡》 저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29 08:00
  • 호수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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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마음이 가난해지면 음식 타령을 하게 마련”

“일주일에 두세 번은 먹어요. ‘돌싱’이 되면서 손수 만들어 먹어야 하다 보니, 간편하게 한 끼를 때우는 데는 라면만 한 게 없죠. 만날 똑같은 방식으로 끓여 먹는 게 지루해지면서 엄청난 개발이 이뤄졌어요. 오래 끓여 먹다 보면 퓨전이 되는 건 당연합니다. 가령 ‘너구리’엔 식초를 살짝 첨가해 먹으면 맛있어요. 얼마 전에 텔레비전 ‘먹방 프로그램’에 나온 걸 응용해 수프 2/3에다 까나리액젓을 넣어봤는데, 괜찮더라고요. 라면비빔밥이란 것도 있어요. 일단 라면을 봉지 안에서 마구 부숴요. 그렇게 부순 라면을 냄비에 넣고 물은 정량의 반, 수프도 반만 넣는데, 자작자작 끓으면 찬밥을 전체 양의 1/2쯤 넣고 비벼 먹으면 기가 막혀요. 채소를 곁들이면 제법 품위도 생기고요.”

라면을 인문학적으로 다룬 책을 하나 써보자는 생각으로 취재를 하던 중에 만난, 중년의 출판업자(조현석·54)가 들려준 얘기다. 언론사 기자 생활을 접고 1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고, 대형 출판사도 혀를 내두르는 한국문학만을 고집하며 15년을 버텨온 공력이 그가 제조해 낸 다양한 라면 레시피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침 일찍 일산의 집을 떠나 홍대 인근의 출판사로 출근하고 밤이 이슥해서야 퇴근하는 그에게 ‘혼밥 달인’이란 별명이 붙은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라면은 그런 그에게 간과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닌 ‘밥’이다.

2년 동안 100권이 넘는 국내외 라면 관련 단행본과 80종에 가까운 관련 논문들을 훑었다. 라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직접 알아보기 위해 라면의 원조인 라멘을 취재하러 일본을 세 번이나 다녀온 뒤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갔다. 작년 겨울에 출간한 책 《라면에 관한 알쓸신잡-라면인문학》에는 말 그대로 라면에 관한 ‘알고 보면 쓸모 있는 신기한 잡학’들이 담겨져 있다. 그 잡학만큼이나 신기하면서도 쓸모 있는 얘기가 바로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라면에 대한 사연과 추억이다. 이 사연과 추억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을 ‘쓸모 있게’ 만드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사실 라면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과학적’인 접근방식을 택한다. 면과 수프에는 어떤 영양성분이 있는지, 라면에 함유된 나트륨은 건강을 해칠 만한 것인지, 해치면 얼마나 해치고 어떻게 해치는지, 해치지 않으면서도 라면 고유의 맛을 즐기게 하려면 어느 정도를 사용해야 하는지, 면을 튀기는 기름에 들어 있는 콜레스테롤과 유해 지방은 어느 정도인지, 포장지나 용기에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는지, 검출된다면 인체에 해를 끼칠 만큼인지를 따지고 검토하고 분석한다. 

하창수 작가가 쓴 《라면에 관한 알쓸신잡》
하창수 작가가 쓴 《라면에 관한 알쓸신잡》

잊히지 않는 첫 라면에 대한 저마다의 기억 

이렇게 ‘과학적’으로 따져지고 검토되고 분석된 결과는 “라면은 안전한 식품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으로 기능하고, 이 대답은 곧 라면 제조업체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라면의 안정성’에 대한 유용한 정보가 된다. 라면 제조업체에 또 다른 중요한 자료가 되는 라면의 소비패턴, 유통과 마케팅, 포장지에 대한 연구 등도 역시 과학적 접근법만큼이나 엄밀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라면에 대한 이런 방식의 분석과 검토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는데, 저마다 미묘하게 다르게 느끼고 경험한 라면의 맛과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라면에 대한 추억 같은, 라면이라는 독특한 ‘상품’에 닿아 있는 정서적 측면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라면은 특정한 물건을 지칭하는 용어 이상의 무엇이다. 필자에게도 당연히 그렇지만, ‘라면 책’을 쓰기로 작정하고 다양한 연령과 사는 지역, 하는 일에 구애받지 않고 광범위하게 ‘라면 소비자’들을 만나면서 새삼 확인한 사실이기도 하다. 취재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물어본 질문 중 하나가 “언제 라면을 처음 먹었고, 그 맛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였는데 대부분은 그때 그 맛을 정확히 기억했고, 그때 경험한 ‘첫 맛’의 강렬함은 세월의 흐름에도 퇴색되지 않은 채 라면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이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라면의 시작은 먹거리가 부족하던 때의 구황작물과도 같은, 해마다 천형처럼 찾아오던 보릿고개 시절 땅바닥에 고이 묻어두었다가 쪄 먹던 감자 몇 알의 ‘눈물겨움’이었다. 라면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추억에는 라면 하나를 온전히 먹고 싶었지만 늘 국수를 함께 넣고 끓여주던 어머니의 ‘안쓰러움’이 들어 있다. 이 도저한 ‘인간학’, 애절한 ‘존재론’은 과학이 잴 수 없다. 언제 어디서든 쉽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지금, 라면에 깃든 눈물과 아쉬움은 어쩔 수 없이 철학의 품 안에, 그러니까 인문학이 품어야 할 보편적 주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에 끼여 숨진 김용균씨를 추모하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그가 남긴 컵라면을 들고 분향소로 향하고 있다. ⓒ 하창수 제공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에 끼여 숨진 김용균씨를 추모하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그가 남긴 컵라면을 들고 분향소로 향하고 있다. ⓒ 하창수 제공

라면에 깃든 눈물과 아쉬움

이 인문학적 주제를 라면의 시작과 함께한 사람이 바로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이다. 라면이 한국에 상륙할 무렵 대학원 조교를 하며 양은냄비에 끓이고 또 끓여서 ‘비누 냄새가 나도록’ 라면을 끓여 먹었던 그의 라면에 대한 추억은 분명 그(의 세대)만의 특별한 추억이지만, 라면에 대한 정서적 교감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지금의 우리와도 공유한다.

“내가 ‘라면’에 맛을 들인 것은, 대학 연구실에서 조교 노릇을 할 때였다. 오랜 하숙 생활에 진력이 나 거의 연구실에서 먹고 자고 할 때였는데, 겨울날 연구실에 피워놓은 연탄난로에 ‘라면’을 끓여 먹는 맛은 가장 그럴듯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때에 내가 느낀 라면의 가장 큰 덕목은 간편함이었다. 냄비 하나와 물만 있으면 끼니를 때울 수가 있었다. 라면이 나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라면을 만드는 기름이 좋지 않았든지, 아니면 설거지를 꼼꼼하게 하지 않아서였는지, 서너 달쯤 라면을 끓여 먹으면 냄비 밑바닥에서 비누 냄새가 났다. 그래도 나는 라면의 맛을 탓하지 않았다. 물 끓는 소리(물 끓는 소리가 귀에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지는 아는 사람만이 안다)와 라면이 알맞게 익었을 때에 퍼지는 구수한 냄새, 그런 것들이 ‘라면’의 맛을 이루는 것이겠지만, 그때는 물을 적게 해 거의 떡처럼 만들어 그것을 술안주로 먹기까지 했다.”

필자가 책을 쓰겠다고 생각하고 처음 읽은 글이기도 한 김현의 ‘라면론’은 만약 라면박물관이란 게 세워진다면 표지석에 아로새겨야 할 명문이다. “사람은 마음이 가난해지면 음식 타령을 하게 마련이다”로 시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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