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 최초로 전래된 불교의 성지를 찾아라”
  • 박재락 국풍환경설계연구소장∙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2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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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와 ‘직지사’에서 지기(地氣)와 후손을 위한 기를 받는 방법

한국의 불교역사는 나말여초(羅末麗初)때 불교문화의 융성기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천년고찰로 알려진 곳은 대부분 이 시대를 전후해서 창건된 곳이다. 그렇지만 시대적 전환기와 많은 변란을 거치면서 폐사지로 남게 되었거나 또는 훼손되어 다시 중수를 거치면서 명맥을 이어와 현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사찰 터를 소점한 사람도 대부분 국사나 명승 등을 내세워 역사성과 더불어 명당에 입지한 도량공간임을 내세우고 있다.

사찰마다 창건유래가 있지만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신라에서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곳, 사찰의 창건이 한 스님에 의해 이루어진 곳은 경북 선산의 ‘도리사(桃李寺)’와 김천의 ‘직지사(直旨寺)’다. 두 사찰은 한국사찰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대(訥祗王代:417~458) 아도화상(阿度和尙)에 의해 최초로 전교가 시작됐고, 법흥왕(法興王) 528년에 비로소 공인됐다.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소재. 신라 최초의 사찰로, 고구려에서 건너온 아도화상(묵호자)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신라 불교의 초전지에 해당하며, 인근에 아도화상과 관련한 여러 유적이 남아있다. ⓒ연합포토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소재. 신라 최초의 사찰로, 고구려에서 건너온 아도화상(묵호자)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신라 불교의 초전지에 해당하며, 인근에 아도화상과 관련한 여러 유적이 남아있다. ⓒ연합포토

도리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아도화상은 처음 포교를 하러 선산부 도개에 와 눈 속에 오색의 복사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곳을 길지로 여겼다. 그 길지에 417년에 창건됐다. 서편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곳 역시 사찰을 세울 터가 있다고 해 418년에 직지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두 사찰의 창건설화는 일주문에 있는 ‘海東最初伽藍聖地(해동최초가람성지) 太祖山桃李寺(태조산도리사)’라는 편액과 ‘黃嶽山直旨寺(황악산직지사)’라는 편액에서 말해준다.

‘직지’라는 사찰이름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신라의 불교성지는 아도화상에 의해 터를 잡은 초전지인 선산의 ‘도리사’가 분명하고, 김천의 ‘황악산문 직지사’도 천년고찰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두 사찰에서 웰빙을 위한 좋은 기를 받을 수 있는 풍수공간은 어디일까.

도리사가 입지한 곳은 낙동정맥에서 분맥한 팔공지맥에서 기봉한 냉산(692m)이 주봉을 이루었다. 여기서 뻗어 내린 용맥이 급히 내려가면서 세운 태조산의 상층부 표고 520m에 자리하고 있어,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사찰의 전각들이 조성돼 있다. 상층부의 적멸보궁과 석가여래사리탑은 20세기 말에 조성된 것이라 지기(地氣)를 받지 않는 곳에 입지하고 있다. 풍수지리학에서는 용맥이 급히 내려오다가 완만하게 터를 이룬 곳을 지기가 머문 것으로 정의한다.

 

좋은 지기를 받기 위한 참배 순서

이렇게 지기가 머문 곳은 용맥이 땅속으로 들어가면서 산모가 아이를 가진 둥근 배처럼 나타나는데, 지금의 석종형 부도가 있는 사리탑 옛 터 앞이다. 즉 주산에서 뻗어 내린 주용맥이 잠시 머물면서 잉(孕)을 이룬 곳에 석종형 세존사리탑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8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금동육각사리함’과 그 안에 사리가 담겨져 발견된 곳이다. 이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좋은 지기를 받도록 터잡이를 한 것이다.

그리고 앞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인 극락전을 조성해 지기를 받도록 하였다. 또한 전면 가까이에는 도리사석탑을 세워 놓았다. 이러한 공간배치는 용맥을 따라 흐르는 땅속의 지기를 머물도록 압승(壓乘) 형태의 비보풍수를 한 것이다. 도리사를 간다면 이곳을 찾아 먼저 ‘잉’에 올르기를 권한다. 지기를 느끼고 난 뒤 다시 내려와 세존사리탑-극락전-도리사석탑을 차례로 참배하여 지속적으로 표출하는 기를 받도록 한다. 

용맥은 다시 남은 지기를 분출하기 위해 석탑의 좌측방향으로 가지맥을 뻗어 내려 행룡을 한다. 용맥이 좌우로 꿈틀꿈틀 거리면서 살아있는 형태로 완만히 내려가다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급히 멈추면서 지기를 응집하면서 땅위로 암반을 표출시켜 작은 터를 이루었다. 이곳은 당시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하고 정진을 위한 참선공간으로 알려진 ‘좌선대’다. 이러한 흔적이 현존한다는 것은 지기가 지속적으로 표출한다는 의미다.

 

후손을 위한 기를 받는 방법

직지사가 입지한 곳은 백두대간의 황학산의 강한 지기를 받고 있다. 즉 황학산에서 뻗어 내린 좌선지맥이 크게 환포하면서 힘 있게 행룡하다가 현무봉을 세웠다. 여기서 용맥이 다시 두 가지 맥을 뻗어내려 강한 용맥은 삼성각과 비로전으로 입수했고, 약한 용맥은 대웅전으로 입수했다.

건물 앞쪽 마당공간은 각각 전면에 석탑을 세워 놓았다. 출입구는 루(樓)형태의 건물로 앉혔다. 이러한 공간배치는 직지사 터는 두 용맥의 강한 지기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비로전에는 1656년 경잠스님께서 손수 경주 옥돌로 16년 동안 조성한 1000인의 부처, 천불상이 놓여져 있다. 이중 벌거벗고 있는 입상동자불을 한 눈에 찾으면 득남(得男)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은 풍수지리적으로 황학산의 강한 용맥이 뻗어오면서 정조의 태실을 만든 뒤 다시 응집된 용맥이 비로전으로 입수한 곳으로, 잉태를 위한 생기가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후손발복을 위한 기를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동선을 통해 지기를 받도록 한다.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황악산에 자리잡은 직지사 비로전에 있는 천개의 불상. 경주 옥돌로 만들어졌으며 제작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천 개의 불상이 높이 30㎝, 둘레 26㎝ 정도로 큰 차이 없이 거의 같지만 모습은 각각 약간씩 다르다. ⓒ연합포토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황악산에 자리잡은 직지사 비로전에 있는 천개의 불상. 경주 옥돌로 만들어졌으며 제작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천 개의 불상이 높이 30㎝, 둘레 26㎝ 정도로 큰 차이 없이 거의 같지만 모습은 각각 약간씩 다르다. ⓒ연합포토

먼저 이러한 생기를 제대로 받기 위해서는 직지사를 감싸고 흐르는 백운천을 따라 절의 상층부까지 올라와 황악루에 이른 뒤 다시 서쪽으로 돌아가 삼성각에 먼저 들른다. 이곳 뒤편으로 들어오는 ‘잉’에 올라 강한 지기를 느끼면서 맞은 편 목형체의 안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황악루로 돌아와 마당의 석탑주위를 탑돌이 하면서 기도를 한 뒤 정갈한 마음으로 비로전에 들어가 생기를 받도록 한다. 이것은 천기와 지기를 받아 맑은 인기를 표출시킬 수 있는 방법론이다.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있다. 남을 위해 선을 베푸는 것은 어떠한 목적을 동반하기 보다는 자신이 적덕을 쌓는다는 의미가 더 강한 것이다. 이름난 천년고찰은 주로 산중심곡에 자리해 있다. 이러한 산사는 대체로 자연친화적인 생태공간이다. 그래서 자연속의 산사는 인간이 찾아와 서로 좋은 기를 공유할 수 있는 도량공간이라 할 수 있다. 천년고찰의 강한 지기가 머문 곳에 가서 충만한 기를 받는 것, 그것이 바로 웰빙을 위한 행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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