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다시 시작하는 5월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18 16:00
  • 호수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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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의 역사를 기억하며

1981년 5월이었다. 광주항쟁은, 기억 속에는 좀 더 학살로 남아 있는 그 일은 1980년 5월에 일어났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사건은 일어난 순간부터가 아니라 그 일이 인지되고 기억된 순간부터가 시작이다. 그래서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시작된 민주와 독재의 싸움은 1980년대 내내 이제 막 청춘의 문턱으로 들어선 젊은이들을 통해 5월마다 다시 시작하곤 했다. 

때는 1981년이었고, 당시 내가 일하던 실천문학사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광주의 한 서점에서 왔다고 한다. 그는 시민군으로 나간 두 오라비를 대신해 서점을 경영했으나, 더 이상은 밀린 책값을 갚을 수 없다고 했다. 왜요? 오라비들이 돌아오지 않아요. 어디 갔는데요? 나의 이 생각 없는 질문에 그가 한 대답은 갑작스러운 흐느낌이었다. 그것이 나의 시작이다. 그의 오라비들은, 올해 누군가가 말한 데 따르면 가매장되었다가 다시 파내어져 광주국군병원에서 소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두환이 자서전에서 5월 광주의 진실 대부분을 부정한 것은 이 다시 시작함의 위력을 몰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연들이 화석처럼 날짜의 어떤 자리에 박혀 자꾸만 낡아가는 줄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1987년으로 끝났다고, 또는 백담사로 끝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1980년대 내내 새로 시작하던 소위 386세대가 이미 늙어 기득권이 되고 비판을 받으니까, 더는 다시 시작하지 않으니까, 함께 사라져갈 수 있다고 혹시라도 믿었을지도 모른다. 

1980년 5월18일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80년 5월18일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피의 역사’를 ‘빛의 역사’로 바꾸길

하지만 은폐된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려고 요동을 치고, 저질러진 죄악은 죄인이 죗값을 치를 때까지 땅속을 흐르는 검은 피가 되어 울부짖는다. 제도를 잘못 구축한 1987년 체제가 수명을 다해 가자 39년을 침묵했던 사람들에 의해 1980년 5월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내년에 열여덟 살이 되는 어떤 청소년에겐 2019년 5월이 시작일 수도 있다. 전두환은 다시 심판받아야 하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죗값을 치르는 것이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한 번으로 다 이루지 못하는 싸움을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이렇게 우리에게 있다. 전두환 한 사람을 법정에 세우는 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드라마 《녹두꽃》이 동학농민전쟁을 다시 시작하고, 김복동 할머니의 죽음이 일본의 사죄로 마무리될 과거 역사 단죄를 다시 시작하며, ‘김학의 사건’ 수사와 ‘장자연 사건’ 수사가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해도 권력을 누릴 수 있던 자들의 더러운 데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일을 다시 시작한다. 특히 5월19일 밤 하교하는 여학생들의 뒤를 쫓던 군인들이여, 당신들도 다시 시작하라. 인간의 자리로 돌아오라. 

이 5월에 패스트트랙에 올라탄 선거법 개정과 공수처법, 검경 수사권 조정이라는 건조한 이름들을 생각해 본다. 1980년 5월에는 피로 싸웠고 1987년 6월에는 한데 모여 외쳤던 우리는, 이제 제법 민주주의를 하는 모양새로 국회에 많은 일들을 맡겼다. 이 일에는 어떤 막전막후도, 어떤 꼼수도, 어떤 붕당의 이익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야말로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작한 기나긴 피의 역사를 빛의 역사로 바꾸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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