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와치 가마 도자기에 흐르는 조선의 혼
  • 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01 12:00
  • 호수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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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세계사 ⑦] 히라도 번주의 대대손손 부(富)를 만들어준 조선 사기장 ‘거관(巨関)’

지난 글에서 히라도(平戶) 초대 번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공의 향도(嚮導·안내자)를 맡았던 마쓰우라 시게노부(松浦鎮信·1549~1614)가 끌고 온 조선 사기장 중에 진해(지금은 창원시) 웅천(熊川) 출신의 거관(巨関)과 종차관(從次貫), 에이(嫛), 순천 출신 김영구(金永久)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들과 이들의 후손은 도자기를 만들어 당시 히라도번의 산업진흥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나가사키 항구를 통한 대유럽 수출에 엄청난 기여를 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의 에도(江戶) 바쿠후(幕府) 재정에 크게 기여했다.

도자기 굽는 사기장들을 묘사한 미카와치마치 공민관(마을회관)의 타일 벽화 ⓒ 조용준 제공
도자기 굽는 사기장들을 묘사한 미카와치마치 공민관(마을회관)의 타일 벽화 ⓒ 조용준 제공

먼저 1598년 43세의 나이로 끌려온 거관부터 보기로 하자. 이 사람은 조선에서의 원래 이름이 ‘거관’이 아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다음 ‘도자기 선수’라는 뜻의 고세키(巨関)로 불렀기 때문에, 나중에 우리 학자들이 그의 이름처럼 한글 발음대로 불러서 ‘거관’이 됐다.

그는 히라도에서 나가노가마(中野窯)를 열어 찻사발을 만드는 히라도 어용가마(平戸御茶碗窯)의 시조가 되었다. 그가 찻사발을 만들었던 방법은 물레를 돌리는 방식이 아니라, 질(태토·소지)을 나무로 두들기며 모양을 완성하는 ‘다다키(叩き)’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지금의 가라쓰(唐津)에서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이렇게 히라도에서 찻사발을 만들던 거관은 1616년 아리타(有田)의 이삼평이 백자토를 발견하고 일본 최초의 백자를 만들기 시작하자 이에 자극받아 자신도 백자를 구우려고 했다. 그러나 히라도 주변에는 백자를 빚을 만한 도토(陶土)가 없었으므로, 1622년 어린 아들 산노조와 함께 흙을 찾아 나서 아리타 근처의 미카와치마치(三川內町)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거관은 결국 백자토를 찾지 못하고 12년이나 지난 1634년에야 산노조가 지금의 사세보시(佐世保市) 에가미초(江上町)에서 양질의 도석을 발견하고 주거지를 옮기면서 새로운 가마를 열었다. 산노조가 백자토를 발견했어도 아리타에서 이삼평이 만드는 수준의 백자를 바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서 산노조는 20년 동안 히젠의 사라야마(皿山), 즉 아리타 자기가마에서 도제 수업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그 무렵 아리타에는 백자와 청자의 스승으로 유명했던 다케하라 미치이오리(竹原道庵)의 아들 고로시치(五郎七)가 초대를 받고 와 가마를 열고 있었기 때문에 산노조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 다케하라 미치이오리는 역시 거관과 같은 웅천 출신의 조선 사기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는데, 1619년 하카타(博多)를 거쳐 이마리(伊万里)와 아리타 등지에서 도자기를 구웠다는 사실 외에는 자세한 신원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산노조가 다케하라 고로시치에게서 가장 배우고 싶었던 것은 백자에 고스(呉須·도자기에 무늬를 그릴 때 쓰는 남청색 잿물, 코발트블루)를 잘 그려 넣을 수 있는 유약을 만드는 방법이었지만 고로시치가 이를 비밀로 해서 알아내지 못했다. 유약을 만들 때면 2층에 올라가 혼자 배합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로시치가 잿물 거르는 마지막 손질에는 언제나 여자 날품팔이를 쓴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자신의 아내를 고로시치 밑에서 일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유약과 재를 2층에 가져가기 전에 물을 헤아려 두고, 배합소에 가져가서 유약으로 쓰고 남은 재의 나머지를 몰래 가져오게 해서 간신히 배합 비법을 탐구해 내고 그곳을 빠져나와 달아났다. 고로시치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이들 부부를 잡으려고 사람을 보냈기 때문에 이 부부는 하사미(波佐見)의 미쓰노마다(三ツ股) 산속으로 피신해 한동안 숨어 지냈다.

도자기 굽는 사기장들을 묘사한 미카와치마치 공민관(마을회관)의 타일 벽화 ⓒ 조용준 제공
야지베가 발견한 아마쿠사(天草)의 도석 ⓒ 조용준 제공

조선 사기장들, 조정과 바쿠후 헌상용품 만들어

그러다가 1637년 도예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라는 히라도 2대 번주 마쓰우라 다카노부(松浦隆信·1592~1637)의 명령에 따라 산노조는 다시 미카와치마치로 돌아왔다. 나가하야마(長葉山)에 히라도 어용가마를 구축하고 양질의 백자와 청자를 만들어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조선인 사기장들에게도 함께할 것을 요청해 ‘미카와치 사라야마’의 대들보가 되었다.

이처럼 나가하야마 가마가 체계를 잡고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가면서 4대 히라도 번주이자 29대 당주로 할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마쓰우라 시게노부(松浦鎭信·1622~1703)가 1641년 미카와치 일대를 순시하면서 산노조를 불러 칭찬하고 이마무라(今村) 성을 하사한다. 거관 집안이 이마무라라고 하는 사무라이 가문이 된 것이다.

아울러 번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화사나 기타 조수들에게도 ‘후치마이(扶持米·무사에게 쌀로 주는 급여)’를 제공해 도업에 전념하도록 배려했기 때문에 조선 사기장들은 생계 걱정 없이 조정과 바쿠후에 올라가는 헌상용품을 만들 수 있었다. 번은 또한 미카와치에 파견관리 사무소인 ‘시라야마다이칸쇼(皿山代官所)’를 만들어 도자기 생산과 유통의 감시와 감독을 충실히 했다.

이마무라 산노조(今村三之丞)는 정말 일을 열심히 했던 모양이다. 성을 하사받고 2년이 지난 1643년 그는 번주의 허가를 얻어 기하라야마(木原山)와 에나가야마(江永山) 두 곳에 가마를 더 열어 도리요(棟梁·우두머리)와 다이칸(代官·번주 대행의 지역 책임자)을 맡는다. 요즘말로 얘기하자면 프랜차이즈를 낸 것이다. 이로써 미카와치의 히라도 어용가마는 ‘산사라야마(三皿山)’ 체제를 확립하며 번영의 틀을 구축했다. 번주는 이런 산노조의 공을 인정해 히로마사(廣正·큰 칼) 1구와 봉토를 하사했다. 드디어 칼을 차고 다니는 명실상부한 사무라이가 된 것이다.

산노조의 부친인 거관은 1643년 88세로 사망한다.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장수한 셈이다. 1650년이 되면 히라도 나가노가마에 있던 조선 사기장들 모두가 이곳으로 옮겨와 히라도 도자기는 쇠퇴하고 미카와치가 확고부동한 중심지로 번성하기 시작한다.

미카와치 가마에 혁신을 불어넣으며 또 한 번 크게 일으킨 것은 산노조의 아들인 이마무라 야지베(今村弥次兵衛·1635~1717)였다. 야지베는 일곱 살 때부터 할아버지 거관에게서 도예 수업을 받는 등 ‘영재 코스’를 밟다가, 할아버지가 사망한 다음에는 아버지 밑으로 들어왔지만 아버지의 도토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만의 도토를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야지베는 1662년 구마모토현의 아마쿠사(天草)에서 매우 좋은 도토를 발견했으나, 이곳은 관할 번(番)이 달라서 직접 채굴할 수 없었다. 그러자 야지베는 이름을 지로베(次郞兵衛)라고 속이고 땅 주인 우에다(上田)와 계약을 맺어 이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야마쿠사의 도석은 지금도 여전히 일본 최고의 도토로 손꼽히면서 사용되고 있다.

도자기 굽는 사기장들을 묘사한 미카와치마치 공민관(마을회관)의 타일 벽화 ⓒ 조용준 제공
당초문(唐草文)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디자인한 미카와치의 접시들 ⓒ 조용준 제공
도자기 굽는 사기장들을 묘사한 미카와치마치 공민관(마을회관)의 타일 벽화 ⓒ 조용준 제공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뛰어난 솜씨의 히라도-미카와치야키 꽃병(마쓰우라 사료박물관 소장). ⓒ 조용준 제공

미카와치 가마, 도쿠가와 바쿠후 어용가마로 승격

이후 이 흙과 원래 가마가 있던 미쓰다케(三ツ岳)의 돌을 조합해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순백의 백자를 완성하기에 이르니 그 품질이 너무 뛰어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다. 야지베는 이에 그치지 않고 푸른 쪽빛을 그려 넣거나(염색), 세공과 조각을 더하고 히네리모노(ひねり物·비틀어 만든 제품) 등 기술을 발전시킨 작품을 만들었다.

1664년이 되면 마카와치 가마의 명성이 일본 전역에 알려지면서 도쿠가와 바쿠후의 어용가마로 승격하게 된다. 이에 시게노부 번주는 야지베를 불러 공을 칭찬하면서 신분을 100석 녹봉의 오우마마와리(御馬廻·말을 관리하는 하급 무사를 말함)로 승격시켜주고, 마쓰우라 가문의 꾸지나무잎(梶の葉) 문장이 그려진 삼베옷 한 벌, 철에 맞는 옷 한 벌, 산수화 한 폭과 여러 개의 그림본을 하사했다.

미카와치마치 도예기술은 점점 호평을 받으면서 명성도 더욱 높아져 1699년이 되면 드디어 왕실 어용가마로 지정된다. 이에 따라 다이묘의 각별한 보호와 감시 아래 청화백자, 양각과 투각 등 정교하고 다양한 도자기들을 구워냈다. 1702년 야지베가 쇼묘(正名)라는 법명으로 스님이 되어 마쓰우라 번주를 방문했을 때 특별히 ‘조엔(如猿)’이라는 호를 지어줄 정도로 그에 대한 대접이 각별했다.

그런데 미카와치마치가 왕실가마로 지정되면서 사라야마 세 곳에 잠입해 비법을 캐내 가려는 다른 지역 사기장들의 염탐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기술 탈취 시도는 18세기 초반에 무려 50~60년 동안이나 계속됐다고 하니, 도자기가 당시 일본 사회에서 얼마나 각광받는 ‘하이테크 산업’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정보전이 치열할수록 이를 막기 위한 통제와 감시도 강화돼 히라도번은 사라야마 대관소를 확충하고 감시소(御番宅)도 여러 곳에 두었다. 제조 방법 일체를 비밀로 해서 사기장도 장남 외에는 이를 전수하지 못하도록 금지했고, 어용품을 올리고 남은 것은 판매하지 않고 깨뜨려서 땅속에 파묻었다.

특히 미쓰다케(三ツ岳)의 흙을 밤중에 파내 배에 실어 다른 다이묘 지역에 판매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도토 채굴장에도 감시소를 만들었다. 아울러 미쓰다케 도토를 채굴해 하이기(早岐·현재 사세보시 바닷가) 창고에 저장하고 감독했다. 이 도토는 가장 흰 것(上太白)을 어용토로, 그다음 흰 것(上白)을 미카와치로, 그다음의 것(下白)은 기하라(木原山)와 에나가(江永山) 사라야마에 보냈다.

야지베에게 도토를 판매하는 계약을 맺었던 아마쿠사(天草) 우에다(上田) 집안의 1796년 기록에 따르면, 당시 미카와치 사라야마에는 두 개의 노보리 가마와 소성실(焼成室)로 사용하는 총 45채의 부옥이 있어 여기서 무려 300명가량의 사람들이 일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이곳 사기장들은 성이 없는 조수들이라고 해도 번에서 ‘후치마이’를 제공했고, 칼을 차는 것이 허용된 무사 신분이 많았다고 돼 있다.

아울러 어용가마 기술은 ‘잇시조덴(一子相伝)’ 즉, 한 명의 자식에게만 전수하도록 엄격하게 보호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장남이 이를 이어받았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 뛰어난 기술을 계승시키기 위해 장남뿐만 아니라 차남이나 삼남에게도 교육을 하도록 했다.

도자기 굽는 사기장들을 묘사한 미카와치마치 공민관(마을회관)의 타일 벽화 ⓒ 조용준 제공
미카와치마치 도예촌 입구 묘지의 불상에 바쳐진 술잔들. 조선 사기장들의 명복을 비는 것처럼 보인다. ⓒ 조용준 제공

기념비에 조선 사기장들의 은덕은 거론하지 않아

현재 미카와치마치의 서쪽 산등성이에는 도조신사(陶祖神社)가 있다. 1842년에 세워진 이 신사는 이마무라 야지베, 즉 조엔(如猿)을 대명신(大命神), ‘조엔다이묘진(如猿大命神)’으로 모시는 신사다. 그런데 원래 이 신사 자리에는 ‘웅천신사(熊川神社)’가 있었다. 바로 이마무라 집안의 조상, 진해 웅천 사람 거관을 씨족신으로 모시는 신사였다. 

거관을 모시는 웅천신사가 거관의 손자인 야지베를 모시는 도조신사로 바뀐 연유는 1842년 마쓰우라 가문 35대 당주 겐히로무(源凞)가 거관 후손인 이마무라 스치타로(今村槌太郞)에게 상과 각서를 내리면서 새 신사를 짓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그 각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상 조엔(如猿)에게 옛날 한없이 입은 은덕을 세 사라야마(皿山)에 살고 있는 후손들은 자자손손 잊지 말지니, 그러므로 앞으로 도기(陶器), 만족, 기원소로서 조엔다이묘진(如猿大命神)으로 우러러 받들고 제사를 지낼지어다.

이후 1910년 거관의 후손들은 거관의 묘비와 유해를 구로가미야마(黑髮山)에서 미카와치 본산으로 옮겨와 조상 3대를 같은 곳에 모셨다. 1917년에는 마쓰우라 38대 당주인 아쓰시(厚·1864~1934) 백작이 ‘세 사라야마 개요 기념비(三皿山開窯記念碑)’를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5대 히젠 태수 히로무(凞)공이 이마무라 제2대 조(祖) 조엔(如猿)이 개요(開窯)한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그 7세손에게 조엔을 영원히 잊지 않고 제사 지내기를 명하였다. 이 일을 글로 새겨둠은 옳은 일이라, 지금이라도 그 내력을 써서 기념한다.

기념비를 세운 아쓰시 백작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유럽에서 7년 동안 지낸 엘리트였다. 그의 아버지 아키라(詮·1840~1908)는 여자학습원, 일본여자대학교 등에서 다도 교수를 맡고, 메이지 시대의 다도 부흥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렇게 이 가문이 다도에도 뛰어나게 된 것은 미카와치 어용가마가 체계를 잡으면서 마쓰우라 시게노부에 의해 사무라이 다도(武家茶道) 유파인 지금의 ‘친신류(鎭信流)’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재화가 넉넉하고 자신의 영지에서 뛰어난 찻사발을 만드니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세키슈류(石州流)을 기본으로 하고 엔슈류(遠州流), 산사이류(三斎流) 등의 장점을 더해 다도를 만들었다.

마쓰우라 가문이 대를 이어 융성하고 부를 누린 것은 미카와치 가마의 도자기로 벌어들였던 엄청난 재화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미카와치 가마를 연 지 300년쯤 되는 1917년 당시 미카와치 한 해의 도자기 생산액은 20만 엔에 달했다. 이를 100년이 지난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200억 엔도 넘는다. 그러니 거관의 후손들에게 조상의 은덕을 잊지 말라는 각서도 내리고 기념비도 세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정작 기념비에 새겼어야 할 내용은 조선 사기장들로 인해 자신들이 엄청난 은덕을 입었고, 대대로 호사를 누렸음을 감사해야 하는 것이 되어야 당연하다. 참으로 씁쓸한 본말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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