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시위 주도하는 1020세대 우산혁명 주역들
  • 모종혁 중국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16 10:00
  • 호수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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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세대들, 정당 창당하며 정치세력화…송환법 반대 시위 주도

2016년 5월 일본 NHK는 1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2014년 우산혁명 이후 홍콩 학생운동 주역들의 정치세력화를 다룬 ‘우산혁명 이후 홍콩 젊은이들은 어디로?’였다. 그해 2월 몽콕(旺角)에서 어묵을 파는 노점상을 정부가 단속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단속 소식을 들은 수백 명의 대학생과 청년들이 합세해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방화를 했다. 금세기 들어 시위대가 시작부터 과격화 양상을 보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결국 몽콕 시위로 130여 명이 부상했고 54명이 체포됐다.

2016년 3월, 몽콕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운동 비주류가 홍콩민족당을 창당했다. 홍콩민족당은 ‘홍콩 독립’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그를 위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홍콩공화국 수립 △불법적인 홍콩특별행정구기본법 폐지 △홍콩 주민에 의한 자주헌법 제정 등 5가지 과제를 공표했다. 다음 달에는 학생운동 주류가 데모시스토(香港衆志)를 창당했다. 데모시스토는 일국양제 아래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와 홍콩의 정치적 미래를 시민 투표로 결정하자는 강령을 내걸었다. 데모시스토의 창당에는 우산혁명을 주도한 조슈아 웡도 합류했다.

NHK는 홍콩민족당부터 데모시스토까지의 창당과 그 이후 활동을 두 달 동안 취재했다. 다큐에서는 홍콩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는 1020세대 지도자들이 모두 등장했다. 네이선 로 데모시스토 대표, 조슈아 웡, 앤디 찬 홍콩민족당 대표, 에드워드 렁 본토민주전선 대표, 와이칭 야우 영스피레이션 대변인 등이 그들이다. 그중 주류인 데모시스토는 홍콩 독립에 가장 부정적이다. 다만 일국양제가 끝나는 2047년에 투표로 홍콩의 미래를 결정하자는 입장이다.

6월27일 네이선 로 데모시스토 대표(왼쪽)가 시위대를 이끌며 연설하고 있다. ⓒ EPA 연합
6월27일 네이선 로 데모시스토 대표(왼쪽)가 시위대를 이끌며 연설하고 있다. ⓒ EPA 연합

정당활동 탄압에 청년 정치세력 불만 고조

반면 비주류인 홍콩민족당, 본토민주전선, 영스피레이션 등은 독립 시기와 방식을 두고 파벌이 나누어졌다. 다만 SNS에서는 기세를 올리며 세력을 넓혀갔다. 20대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독립 성향 정당의 인기가 높았고, 데모시스토의 지지율은 저조했다. 하지만 그해 9월에 치러진 입법회 의원 선거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출마 자격을 얻지 못한 홍콩민족당 후보를 제외하고 세 정당은 모두 의원을 배출했다. 지역구 득표율은 데모시스토가 13.5%로 가장 높았고, 독립 성향 정당은 7.4~7.9%를 얻었다.

그 뒤 데모시스토와 독립 성향 정당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데모시스토는 일국양제 아래 민주주의 확립을 요구하는 민주파(反中 성향) 정당과 행동을 같이했다. 그와 반대로 독립 성향 정당은 더욱 극단적인 요구를 내걸었다. 다만 10월 입법회 의원 개회식에서 모두 ‘우산혁명’의 상징인 우산을 들거나 ‘홍콩은 중국이 아니다’라는 펼침막을 내걸어 선서했다. 그로 인해 선서 무효 논란이 일어나 2명은 같은 해 11월에, 4명은 2017년 7월에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지난해 3월과 11월에 치러진 보궐선거에서는 세 정당 모두 출마 자격을 얻지 못했다.

따라서 현재 홍콩 입법회에는 우산혁명 당시 학생운동 출신 의원이 한 명도 없다. 또한 2018년 8월에는 우산혁명 당시 폭력을 휘두른 혐의로 조슈아 웡, 네이선 로, 알렉스 초우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다음 달에는 사단조례(社團條例) 8조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홍콩민족당의 활동이 강제로 중단됐다. 중국에 반환된 이래 정당활동이 법으로 중단되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청년 정치세력의 불만은 고조되어 왔다. 특히 각종 선거에서 홍콩기본법의 폭넓은 조항 해석을 앞세워 출마자의 자격을 제한한 현실을 비판했다.

그 같은 상황 속에서 홍콩 정부가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을 추진하자, 일제히 폭발했다. 6월9일 이래 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200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온 데는 그동안 축적된 정치적 불만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홍콩의 경제적 위상 약화와 무너지는 일국양제에서 비롯됐다.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됐을 때 홍콩의 경제력은 중국 내 그 어떤 성·시보다 컸다. 홍콩 및 광둥성(廣東)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1997년 홍콩 국내총생산(GDP)은 1773억 달러로 중화권 1위였다. 인접한 광둥성 GDP는 937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난해 GDP는 홍콩이 3648억 달러, 광둥이 1조4700억 달러로 역전됐다.

경제적 비중이 줄어들면서 중국 정부가 홍콩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초대 행정장관인 퉁치화 집권기에 중국은 방임에 가까울 정도로 고도의 자치권을 수여했다. 이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고 ‘항인치항(港人治港·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을 약속한 홍콩기본법에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2005년 도널드 창이 행정장관에 취임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여전히 자치권은 존중됐으나 홍콩 내정에 대한 언급이 조금씩 늘어났다. 2012년 렁춘잉 행정장관 취임 이후에는 기조가 완전히 바뀌었다.

특히 같은 해 11월에 시진핑이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하면서 본격화됐다. 과거 장쩌민 및 후진타오 전 총서기는 덩샤오핑의 유지를 충실히 지켰다. 그에 따라 홍콩 행정장관과 항상 동석에서 면담을 가졌다. 덩은 일국양제를 고안해 영국과 홍콩 반환협정을 성사시켰고, 홍콩기본법을 제정했던 주역이다. 덩은 장과 후를 직접 후계자로 낙점했다. 그에 반해 시 총서기는 덩과 직접적인 인연이 없다. 따라서 홍콩 행정장관과 면담할 때 중국 내 각 성·시 수장을 대하듯 아랫자리에 앉히기 시작했다.

홍콩 민주화 시위 ‘우산혁명’의 주역 조슈아 웡이 6월18일 홍콩 정부청사 앞에서 홍콩 행정수반인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진을 든 채 그녀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 AP 연합
홍콩 민주화 시위 ‘우산혁명’의 주역 조슈아 웡이 6월18일 홍콩 정부청사 앞에서 홍콩 행정수반인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진을 든 채 그녀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 AP 연합

‘홍인치항’이 가져온 지금의 갈등

그 뒤 중국은 홍인치항(紅人治港·공산당에 의한 홍콩 통치)을 추진해 왔다. 2012년 국민교육 시행 시도, 2015년 코즈웨이베이 서점 관계자 납치 사건 등이 그러하다. 그 같은 행보에 홍콩인들의 반감은 깊어만 갔다. 이는 홍콩 중문대학이 18세 이상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중국인’이란 응답은 1997년 32.1%, 2006년 18.5%, 2016년 12.2%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나는 홍콩인’은 1997년 23.2%, 2006년 21.4%, 2012년 24%로 큰 변화가 없다. ‘홍콩인이면서 중국인’과 ‘중국인이면서 홍콩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독립 성향 정당의 지지세는 아직까지 미미하다. 그로 인해 지난 7월1일에 그들과 강경 시위대가 입법회 청사를 점거하자, 시민들의 강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9일 캐리 람 행정장관이 송환법의 사망을 선언한 것도 독립 성향 정당과 강경 시위대를 고립시키려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시위를 주도하는 절대 다수 시민들과 홍콩 민주파 정당이 요구하는 건 일국양제의 수호와 민주주의의 철저한 확립이다. 따라서 중국의 홍인치항 행보가 바뀌지 않은 한 홍콩에서의 갈등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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