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목소리 전하는 독일 팟캐스트
  • 강성운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2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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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팟캐스트 제작자 양성 프로그램 베를린에서 진행…“큰 힘은 없지만 중요한 네트워크”

베를린에 기반을 둔 독일 저널리스트 프랑크 정은 지난 2016년 ‘절반의 감자(Halbe Katoffl)’라는 제목의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그는 대학에서 체육을 전공했고 러닝 관련 온라인 매체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팟캐스트에서만큼은 다른 ‘전문분야’를 다루기로 했다. 바로 이주 배경을 지닌 독일인, 혹은 백인이 아니지만 독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프랑크 정의 또 다른 이름은 정유진이다. 그는 “우리 부모님은 한국인이지만 나는 독일에서 나고 자랐다. 이주 배경을 지닌 독일인들은 매체의 관심을 적게 받는다. 나는 ‘절반의 감자’의 일상을 들려주고 싶었고, 또한 모든 이들에게 와 닿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며 팟캐스트를 시작한 동기를 들려줬다. ‘감자’는 독일에서 나고 자란 백인을 짓궂게 일컫는 말이다. 정씨는 “이주 배경을 지닌 독일인들은 스스로 자신이 일부만 독일인답다고 느끼기도 하고, 혹은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보기도 한다”며 제목을 설명했다.

20유로짜리 마이크 한 개로 출발한 그의 팟캐스트는 현재 독일에서 다양성과 이민 문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례가 되었다. ‘절반의 감자’는 매회 다른 게스트를 초대해 약 60분간 그들의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게 모인 30여 편의 이야기는 백인 주류사회의 청취자들에게 비(非)백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특히 브라질계 독일인인 야스민이 출연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녀가 청소년기에 당한 매우 심각한 인종차별적 공격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마을 축제에서 사람들이 그녀의 몸에 불을 붙이려 했다. 프랑크 정의 팟캐스트는 2018년 독일 최대 온라인 미디어 시상식인 그림 어워드의 후보에 올랐고, 유럽위원회의 미디어 다양성 진흥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는 프로젝트로 성장했다.

7월8일부터 12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성소수자 팟캐스트 프로그램인 ‘사운드업’ 우승자들. 왼쪽부터 요제피네, 타모, 파비안 ⓒ Marlene Stahlhuth
7월8일부터 12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성소수자 팟캐스트 프로그램인 ‘사운드업’ 우승자들. 왼쪽부터 요제피네, 타모, 파비안 ⓒ Marlen Stahlhuth

‘소수자’ 팟캐스트 틈새시장 형성

독일은 지금 팟캐스트 붐이다. 지난 2016년 유명 풍자 코미디언인 얀 뵈머만이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팟캐스트로 옮긴 것을 시작으로, 주요 언론사와 각 분야의 저명인사들이 팟캐스트 방송에 뛰어들었다. 전문가들은 유튜브와 넷플릭스 등을 이용해 어디서든 영상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영상매체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대안으로 팟캐스트가 떠오르게 됐다고 분석한다. 광고와 음악, 짧은 멘트와 교통정보 위주로 구성된 독일 라디오방송이 느린 속도로 깊은 내용을 음미하고 싶어하는 청취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다.

‘절반의 감자’ 사례가 보여주듯 팟캐스트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새로운 관점을 소개하는 대안 매체 역할도 맡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퀴어 부모들에 관한 팟캐스트를 기획 중인 마디타 하우슈타인은 시사저널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팟캐스트는 가정사와 같이 민감한 주제를 다루기에 적합한 친밀한 매체”라고 전했다. 다니엘 에크 ‘스포티파이’ CEO 역시 마치 말하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팟캐스트의 강점이라고 말한다. 팟캐스트 청취자들은 진행자에게 쉽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이 때문에 소수자들의 목소리에도 더 공감하기 쉽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7월8일부터 12일까지 5일간 독일 베를린에선 세계 1위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스포티파이’ 주최로 성소수자 팟캐스트 제작자 양성 프로그램인 ‘사운드업’이 진행됐다. 지난해 6월 미국 뉴욕에서 처음 개최된 이후 영국 런던, 호주 시드니를 거쳐 이번이 4회 차다. 사운드업은 그동안 유색인종 여성(뉴욕·런던), 선주민(시드니) 등 개최 도시마다 다른 소수자 집단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주최 측은 “팟캐스트에 더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됐다. 미국의 예를 들면, 팟캐스트 진행자 중 여성은 22%에 불과하며 유색인종 여성으로 범위를 좁히면 이보다 훨씬 수가 적다. 각 나라의 지사와 긴밀한 협업을 통해 대상 그룹을 선정했으며 각 시장의 팟캐스트 카탈로그를 살펴봤다”고 밝혔다.

독일에서 진행된 이 프로그램엔 150명 이상이 신청서를 냈다. 서류심사와 화상전화 인터뷰를 거쳐 선발된 10명의 참가자들은 팟캐스트 제작 경험이 전혀 없는 ‘초짜’들이었다. 주최 측은 이 워크숍에 참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아이디어’를 꼽았다. 실제로 워크숍 참가자들은 성소수자 산악대인 ‘핑크 서미츠(pink summits)’, 장거리 연애, 독일 내 아시아계 성소수자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제안했다. 주최 측은 참가자들에게 팟캐스트 제작에 필요한 기술적 노하우와 스토리텔링 기법, 마케팅, 호스팅, 저작권법 등에 대해 전문가 강연을 제공했다. 참가자들은 베를린의 한 스튜디오에서 자유로이 녹음을 진행했다.

마지막 날에는 짧은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퀴어 미디어 비평, 농촌 지역의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부모의 일상을 다룬 3개의 프로젝트에 각 8000유로의 상금이 수여됐다. 참가자 중 한 명인 하우슈타인은 수상에 실패했지만 “프로그램을 통해 생겨난 유대감이 더 중요하다. 참가자 10명은 앞으로 독일어권 팟캐스트에서 작지만 중요한 네트워크를 이룰 것”이라고 참가 소감을 전했다.

‘단기 이익‘보다 ’이야기‘에 투자한다

스포티파이가 현재 ‘최우선 순위’로 손꼽는 팟캐스트 사업 분야에서 소수자 지원에 나선 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먼저 시장성이 떨어지는 분야에 장기적 투자를 한다는 점이다. 사운드업은 스포티파이 기업이 단기적 이익뿐 아니라 들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에 투자한다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 다른 측면은 이 같은 사업이 시장과 대중들에게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다. 이른바 ‘다양성 마케팅’이 효과를 거두려면 소수자 인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느 정도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한 주류업체가 지난 6월 서울 퀴어 퍼레이드 20주년을 기념해 성소수자의 상징인 무지개색으로 칠한 맥주캔을 출시했다가 일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반발이 일자 “공식적으로 동성애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은 아니다”며 발을 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도 출신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학자인 가야트리 스피박은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는 사람들을 서발턴(subaltern)이라 불렀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책을 통해 그녀는 소수자들이 교육과 매체 접근성, 주류사회의 무관심 혹은 강요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을 비판한다. 미혼모, 결혼 이주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빈곤층 노인 등 한국 사회에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팟캐스트를 만든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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