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열풍, 한국 드라마를 바꾸다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27 12:00
  • 호수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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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블유》, 남성 중심 드라마의 완전한 전복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는 한국의 양대 포털사이트인 ‘유니콘’과 ‘바로’를 배경으로 한다. 1위 포털이자 외국기업의 한국 지사로 설정된 유니콘을 보면 한국 최대 포털 네이버와 일본 최대 포털이며 미국 기업의 지사로 시작한 야후재팬 등이 떠오른다. 2위 포털이자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IT기업으로 설정된 바로는 다음카카오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현실의 기업이 연상될 정도로 작품은 포털 업종의 특성과 직장 내 분위기를 공들여 묘사했다.

보통 우리 드라마에서 직장은 ‘실장님’과 신입 여사원이 연애하는 배경 정도로 그려졌다. 등장인물들은 회사 일을 언제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개인사에 골몰했다. 하지만 《검블유》에선 인물들이 주로 하는 고민이 회사 일이다. 업무에 임하는 모습이 드라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첨단 업종을 배경으로 직장인 드라마를 그렸는데 그 주역이 모두 여성이다.

유니콘의 본부장인 배타미(임수정 분)는 회사에서 부당하게 내쳐진다. 배타미는 경쟁 포털인 바로로 옮겨 유니콘을 따라잡기 위한 TF팀을 이끌게 된다. 배타미를 앙숙으로 여겼던 바로의 차현(이다희 분) 소셜본부장은 흔쾌히 TF팀에 합류해 배타미 팀장에게 협력한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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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가 女에게 ‘빽’도 주고 ‘빽’도 돼 주는 드라마

이 두 명이 모두 여성이고, 이들과 애증관계에 있는 송가경(전혜진 분) 이사도 여성이다. 그 밖에 한국 최대 재벌인 케이유그룹 회장, 유니콘 대표이사, 미국에서 온 유니콘 본사의 대리인 등 책임 있는 위치의 인물들이 모두 여성으로 그려졌다. 고위직 중에서 남성이며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 사람은 바로의 대표뿐이다. 대통령은 남성인데 포털에 검색어 조작을 요구하는 부정적인 인물이고, 그에 호응하려는 바로 부사장, 양다리 걸치며 거짓말을 일삼는 바로 게임본부장 등 ‘꼰대’ 격인 남성들이 대부분 부정적 캐릭터다.

긍정적인 남성들은 여성보다 아랫자리에 있다. 배타미가 이끄는 TF팀원들은 여성 셋에 남성이 둘인데, 이 남성들이 긍정적인 캐릭터로 그려졌다. 하지만 여성들이 주도적이고 남성들은 보조적인 역할이다. 배타미와 차현이 사귀는 남자친구들도 긍정적인데, 배타미의 남자친구는 연하이고 차현의 남자친구는 차현의 후원을 받는다. 철저히 여성 중심적인 구성인 것이다.

기존 드라마의 남녀 성역할도 뒤집었다. 보통 남성은 회사 일에 열심이고 여성은 사랑이나 가정사에 목매는 역할로 나오는데, 《검블유》에선 여성이 회사 일에 몰두한다. 흔히 남성은 뒤끝 없는 의리의 주인공이고 여성은 시기, 질투에 잘 토라지는 캐릭터로 묘사되는데 여기선 배타미와 차현이 앙숙이다가도 일할 땐 뒤끝 없이 협력한다. 여타 여성 캐릭터들도 다른 이의 성공을 질투하지 않고 사심 없이 도와준다. 배타미는 연하의 남자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내가 야하게 입고 다니지 말라고 했지.” 이건 전형적인 남성 캐릭터의 대사였다.

기존 드라마에선 남성이 냉정하고 이성적인 반면 여성은 감정적으로 묘사됐다. 여기선 여성들이 철저히 이성적이다. 맞서다가도 상대가 논리적으로 설득하면 즉시 동의한다. 심지어 ‘빽’도 여성이 여성에게 준다. 기존 드라마에서 ‘빽’은 남성 ‘실장님’이 신입 여사원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여기선 배타미가 신입 팀원에게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보이라며 명품가방을 선물했다.

여성이 여성에게 ‘빽’도 주고 ‘빽’도 돼 주는 드라마. 남성 중심 드라마의 완전한 전복이다. 주도적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여성들이 도맡아 한다. 남성에 대한 결핍 없이 여성들만의 관계로 충분하다는 가치관도 언뜻 내비친다. 극 초반에 차현과 송가경 사이에 동성애적 긴장을 암시하는 장면이 잠시 등장한 것이 그렇다. 물론 여긴 한국이기 때문에 그런 코드를 대놓고 강조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분위기는 풍겼다. 제목의 ‘WWW’는 인터넷을 뜻하지만 동시에 배타미, 차현, 송가경이라는 세 여성을 뜻하는 것도 같다. 이것도 여성들만으로 충분하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이런 드라마가 등장한 것은 최근 여성주의 열풍의 소산이다. 미투운동 이후 여성들의 자각이 이어졌고 여성주의(페미니즘) 트렌드를 낳았다. 그것이 대중문화에 속속 반영되고 있다.

SBS 《열혈사제》에선 형사팀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정의감 넘치는 형사가 여성으로 그려졌다. SBS 《녹두꽃》에선 전라도 보부상 조직을 이끌고 전장을 넘나드는 객주가 젊은 여성이었다. KBS 《닥터 프리즈너》에선 괴한의 습격을 받은 여의사가 남성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제압하는 장면이 나왔다. tvN 《호텔 델루나》에선 귀신에게 위협을 당하는 남주인공을 여주인공이 구해 줬다. 영화계에서도 《걸캅스》가 보통 남성이 하던 버디무비의 형식으로 경찰액션을 선보였다. 외환위기를 다룬 《국가부도의 날》에선 무책임한 관료들 속에서 유일하게 선견지명이 있고 국민을 생각하는 고위 공무원으로 여성이 등장했다. 실제론 외환위기 당시 그 자리에 여성 관료가 없었다고 하는데도 제작진이 여성을 배치했다.

 

대중문화 속 여성주의 바람, 이제 시작

여성주의 바람은 할리우드에서 더 뜨겁다. 《캡틴마블》에서 ‘어벤져스’ 최강의 히어로가 여성으로 등장한다. 천만영화 《알라딘》에선 자스민 공주가 알라딘을 밀어내고 중심인물이 됐다.

여성주의 바람은 이제 시작이다. 역사적 큰 흐름의 방향성이 잡힌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진전될 것이다. 대중문화계에서도 남녀 역할을 전복한 《검블유》를 시작으로 더 많은 여성주의적 작품이 나올 것으로 예측된다. 대중문화계의 주 소비층인 여성 관객들이 여기에 호응하고 있어 시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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