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엑시트》, 땀내 나게 달리는 ‘헬조선’의 청춘들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03 12:00
  • 호수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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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시트》가 보여주는 신선한 상상력

테러가 벌어졌다. 직접 접촉할 경우 수분 내에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최악의 유독 가스가 도시 전체에 퍼져나간다. 공기를 타고 점점 위로 올라오며 퍼지는 가스를 피해 사람들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며 탈출을 염원한다. 그러다 자신이 있는 건물에서 더 올라갈 곳이 없다면? 구조 헬기가 언제 도착할지 장담할 수 없다면?

《엑시트》의 답은 이것이다. ‘뭐라도 하라’. 주인공 용남(조정석)과 의주(임윤아)는 대학 시절 산악 동아리에서 배웠던 암벽 타기, 응급처치 기술을 활용하며 상황을 타개해 간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 탄생기가 아니다. 영양가 없는 취미나 파고든다고 “너 심마니(산삼을 캐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 할 거냐”는 비아냥이나 듣던 청년들의 유쾌한 재난 탈출기다. 사회적 압박 안에서 제대로 뜀박질도 못 해 본 세대에게 땀내 나는 성취를 안기는 작품. 한국 재난영화 역사에 가장 신선한 상상력이 도착했다.

여름이면 한국엔 재난영화가 온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2006년 7월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본격적 시작점으로, 여름이 되면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타이틀을 단 작품들이 속속 도착했다. 2009년 7월 《해운대》, 2012년 7월 《연가시》, 2013년 7월 《더 테러 라이브》와 8월 개봉작 《감기》, 2016년 7월 개봉한 《부산행》과 8월 개봉한 《터널》 등이 그 바통을 이어나갔다.

© CJ 엔터테인먼트
© CJ 엔터테인먼트

한국 극장가, 여름=재난영화?

이 중 《해운대》가 첫 천만 관객을 모으면서 한국 재난영화에는 일종의 흥행 공식이 생겨났다. 가족을 중심에 둔 최루성 스토리, 엉망으로 돌아가는 컨트롤타워,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민폐형 캐릭터, 평범한 인물의 활약 등등. 이후 거칠게 분류하면 한국의 재난영화는 거의 두 가지 방향 중 하나로 흘러갔다. 이 공식을 적극 수용하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켜가거나.

《연가시》와 《감기》 등이 비교적 안전한 노선을 택했다면, 《더 테러 라이브》와 《부산행》 그리고 《터널》은 참신한 시도로 눈길을 끌었던 작품들이다. 각각 558만, 1156만, 712만 명을 모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 영화들은 각각의 성취가 뛰어나다. 《더 테러 라이브》는 생방송 뉴스 앵커가 직면하는 테러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한다는 설정을 취했다. 전체를 보여주기보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나가는 구조를 택한 것이다. 《부산행》 역시 달리는 열차 안이라는 독특한 장소를 재난의 무대로 택하면서 성공한 경우다. 여기에 한국 장르영화에서는 아직 이질적이었던 좀비라는 소재를 엮으며 과감한 돌파를 보여줬다.

《터널》은 단지 《더 테러 라이브》와 같은 감독과 배우가 다시 한번 뭉쳐, 제한적 장소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는 ‘원 맨 쇼’라는 비슷한 설정을 택했다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영화의 방점은 재난이 어떤 음모론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그렸다는 데 있다. 《터널》은 조금씩 어긋나다가 결국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 자체를 재난의 표적으로 삼는다. 한국 재난영화의 주인공들이 해결해 나가야 하는 건 재난 그 자체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재난을 둘러싼 사회적 상황도 이겨나가야 한다.

영화 《엑시트》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엑시트》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청년세대가 겪는 진짜 재난

《엑시트》의 특이점은 주인공을 청년세대로 설정했다는 데서 발생한다. 용남은 채용 과정에서 번번이 탈락을 맛보는 취업준비생이고, 의주는 돌잔치와 칠순잔치 같은 가족행사가 주로 벌어지는 컨벤션홀의 부점장이다. 일은 하고 있지만 본인이 뚜렷하게 원해서 가지게 된 직업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견뎌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다. 영화 초반, 용남의 친구는 지진 경고 문자를 받은 후에 용남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진, 쓰나미 그런 것만이 재난이 아니라 지금 우리 상황이 재난 그 자체야.” 그냥 흘려듣기 어려운 대사다.

언제라도 탈출하고 싶은 ‘헬조선’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춘들을 진짜 재난 상황에 몰아넣으면 어떻게 될까. 《엑시트》는 여기에서부터 상상력의 가지를 뻗어나갔다. 가까운 미래, 가상의 신도시를 배경으로 영화는 유독 가스를 피해 달리고 또 달리는 주인공들의 활약을 담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사회 시스템의 무능함이나 생존자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그저 생존의 방식 그 자체다.

영화는 포괄적인 풍경을 조명하는 대신 칠순잔치를 벌이던 용남의 가족, 어떤 계기로 이들과 떨어지게 된 용남과 의주의 이야기로 점점 폭을 좁혀나간다. 《엑시트》에는 국가원수의 군사작전 회의 장면 같은 것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용남과 의주의 선택만이 중요해진다. 저 건물 옥상으로 어떻게 뛸까, 지형지물은 어떻게 이용하나. 상황과 상황을 잇는 아이디어와 사이사이 튀어나오는 유머는 발군이다.

여기엔 ‘한국적’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만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대가족의 난무하는 오지랖, 수없는 실패를 경험하는 청년세대, 가족 단위 잔치가 하루에도 수 건씩 벌어지는 이벤트홀, 네온사인 간판이 덕지덕지 붙은 외벽을 자랑하는 건물들. 《엑시트》는 이 모든 것이 뒤섞인 동시대의 풍경 안에서 루저 취급받던 이들의 활약을 그려낸다.

철봉에서 현란한 동작으로 매달리기, 암벽등반 등 취업에 필요 없는 재주만 가진 채 무능력의 아이콘으로 전락했던 용남의 보유 기술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탈출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된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의주가 서랍 안에 고이 넣어뒀던 산악용 고리는 이들의 구세주가 된다.

그 과정에서 이 영화는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지도 않고, 모두에게 민폐를 끼치는 캐릭터를 굳이 만들지도 않는다. 가만히 있느니 뭐라도 해 본다는 돌격의 자세. 그저 그게 전부라고 말한다. 패기를 잃어버린 세대에게 《엑시트》의 재난 상황이 전하는 응원인 것이다. 암울한 청년세대의 이야기를 그리는 새로운 방식으로도, 이미 익숙해진 재난영화의 공식을 다르게 제시하는 영화로서도 《엑시트》는 부족함이 없다.

 

뿌리는 할리우드 재난영화

대부분의 장르영화가 그렇듯 재난영화의 뿌리 역시 할리우드다. 재난을 스펙터클로 둔갑시키면서 ‘블록버스터’라는 개념이 한층 구체화됐다. 재난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영웅의 탄생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배경으로 한 《샌프란시스코》(1936)가 이 장르의 시초 격이다. 1990년대 말은 세기말 증후군을 타고 이 장르가 급속도로 퍼져나간 시기였다. 《아마겟돈》(1998), 《딥 임팩트》(1998) 등의 작품이 그 방증이다. 이 영화들을 거치며 할리우드 재난영화 역시 가족애에 기반을 둔다는 법칙이 한층 공고해졌다. 다만 9·11 테러 이후 2000년대 초반 할리우드에서는 테러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충돌, 폭발 등의 묘사가 필수적인 이 장르가 조금 자중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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