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性노예’를 계속 ‘위안부’라 불러야 할까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03 17:00
  • 호수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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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말이 품은 독과 속임수를 생각한다

영화 《김복동》을 보았다. 미국에 루스 긴즈버그, 한국에 김복동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다. 김복동은 1992년에 ‘커밍아웃’을 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 16세(만 14세) 나이로 군수공장 노동자로 징용당했으나 실제로는 ‘위안부’가 되었고, 23세(만 22세)에 돌아왔다. 영화 《아이캔스피크》의 실제 모델로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증언한 당사자다. 김복동 이야기는 두고두고 하기로 하고, 일단 영화부터 보시기를 강추한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배상 문제로 일본이 우리나라에 위력시위를 하고 있는 와중의 영화라 더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영화 《김복동》의 한 장면 © (주)엣나인필름
영화 《김복동》의 한 장면 © (주)엣나인필름

일본군 ‘위안부’, 이 용어에서부터 마음이 복잡하다. 1993년 김복동의 증언 이후 1996년과 1998년에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된 쿠마라스와미 및 맥두걸 보고서는 ‘위안부’가 아니라 일본군 ‘성노예’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을 표제에서부터 명료히 하고 있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의 표제는 《전쟁 중 군대 성노예제 문제에 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국 및 일본 조사 보고》이고, 맥두걸 보고서의 표제는 《전시하 조직적 강간, 성노예제 및 그와 유사한 관행》이다. 차마 읽어내기 어려운 증언들이 가득하다.

맥두걸 보고서는 부록의 72번 각주로 “이 말(위안부)은 뚜렷하게 모욕적인 뜻을 가지며 오로지 역사적 맥락에서만 이 구체적인 만행에 붙여진 말이다. 이 범죄를 가리키는 데 불행히도 이와 같이 완곡한 말을 쓰게 된 것은 많은 점에서 국제사회 전체와 특히 일본 정부가 침해행위의 본질을 최소화하려고 애쓴 정도를 보여준다”고 밝히고 있다. 게다가 이 ‘위안부’라는 말은 일본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남성적인 관점에서만 완곡하다. 침략적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의 육체를 유린하는 일을 ‘위안’으로 제공했다는 표현이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가 관용적으로라도 계속 ‘위안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게 옳은가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된다.

 

김복동은 말한다, “내가 증거다”라고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싼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용어 공방이 지속되고 있다. 국제법적이고 역사적인 견지에서 식민지배의 합법성·불법성 같은 논쟁도 있으며, 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른 5억 달러가 한 국가 내부 모든 국민의 피해를 덮을 수 있냐는 논쟁도 있다. 여기에 나는 한 개인의 존엄성을 보호하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어휘들을 모두 점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덧붙이고 싶다. 왜 ‘위안부’는 틀린 말인지, 식민통치의 강제성을 법률로 따질 수 있는지를 살아본 사람들에게 물어보자는 것. 이는 표현(말)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다. 말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성의 문제다.

김복동은 말한다. “내가 증거다”라고. 그 어떤 증거도 살아서 말하는 피해 당사자보다 강력하지는 않다. 그래서 일제는, 그래서 나치는 전쟁 패배가 확실시되자 위안소(유엔은 이를 강간소라 부른다)를 불태우고 여성들을 죽이고자 했으며, 가스실을 폭파하고 서류들을 없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본 우익이 말하기를 매춘부였다고? 매춘부는 강간하고 찢고 때리고 죽여도 되나? 진실하지도, 사람답지도 않다. 인정하고 사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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