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콧 재팬’ 파도, 극장가까지 휩쓸다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10 12:00
  • 호수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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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청이는 일본 영화, 주목받는 항일 콘텐츠 《김복동》 《주전장》 《봉오동 전투》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해지만 일본의 과거사 반성은 요원하다. 급기야 우리나라를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경제보복 조치를 내리면서 ‘보이콧 재팬’ 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는 상황이다. 한·일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그 영향은 영화계로도 확산되는 분위기다. ‘보이콧 재팬’ 운동에 일본 영화들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7월11일 개봉한 《극장판 엉덩이 탐정: 화려한 사건 수첩》은 전국 13만4656명 관객을 만나는 데 그쳤다. 국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일본 베스트셀러 원작이지만, 반일감정 확산과 맞물려 관객들이 선택을 주저한 까닭이다. 실제로 영화 평점란에는 “지금과 같은 시국에 아이들 데리고 보고 싶지 않다”는 부모들의 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영화 《주전장》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영화 《주전장》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일본 불매운동’ 바람에 일본 영화들 휘청

국내에 많은 고정 팬을 확보한 《명탐정 코난》 시리즈인 《명탐정 코난: 감청의 권》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다. 관객이 이전 시리즈에 비해 눈에 띄게 줄었다. 일본 측의 일방적인 더빙판 개봉 불허 조치가 한국 국민의 감정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명탐정 코난》 시리즈 극장판은 강수진, 김선혜 등 베테랑 성우들이 더빙을 맡아 국내 어린이들의 안내판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일본 제작사에서 로컬라이징(개봉 나라에 맞춰 이름, 지명 등을 바꾸는 것)을 이유로 이미 녹음이 끝난 더빙판 개봉을 막았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당 영화 게시판에는 평점 테러가 가해지기도 했다.

8월14일 개봉 예정이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달 탐사기》도 개봉을 잠정적으로 연기했다. 대중 정서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8일 개봉한 《나는 예수님이 싫다》와 《도쿄 오아시스》 역시 상영관 확보에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일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10월 개봉 예정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7년 국내 개봉해 371만 명을 동원한 《너의 이름은.》의 후속작으로 올해 개봉하는 일본 작품 중 최고 기대작으로 꼽혀왔다.

반면 항일 콘텐츠들은 뜻하지 않게 시류를 타고 주목받는 분위기다. 먼저 1992년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후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투쟁했던 김복동 할머니의 27년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김복동》이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김복동 할머니는 위안부 운동의 거목이었다. 1992년 ‘아시아연대회의’에서 피해 사실을 알리며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게 바로 김복동 할머니다.

영화는 김복동을 단순히 피해자로 그리지 않는다. 실제로 김복동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뜨거운 여성 인권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였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소녀의 상을 세우고, 재일 조선 고교생을 위해 평생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전달했다. 암 덩어리가 장기를 망가뜨리는 순간에도 수요시위에 나서 일본의 진실을 촉구했다.

《김복동》엔 역사를 부정하는 아베 정부의 모습이 가감 없이 담겼다. 김복동 할머니를 힘들게 한 건 비단 아베 정부만이 아니다. 2015년 박근혜 정부는 피해자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선언했다. “피해자의 동의 없는 정부 간의 합의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고 말한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말처럼, 2015년 합의로 수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고통받고 있다. 《김복동》은 내부 반성을 촉구하는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돌아오는 8월14일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가 1400회를 맞는 날이다.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지난 1991년 피해 사실을 처음 증언한 날을 기리는 ‘세계 위안부의 날’이기도 하다. 김복동 할머니가 올해 1월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언은 “끝까지 싸워달라”였다. 진실을 찾는 일, 피해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 우리가 끝까지 싸워야 하는 이유가 《김복동》엔 가득하다.

가세 히데야키 일본회의 의원연맹 도쿄본부장이 말한다. “한국은 정말 귀여운 나라예요. 버릇없는 꼬마가 시끄럽게 구는 것처럼 정말 귀엽지 않나요?”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소속된 후지오카 노부카쓰는 또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사죄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는 예를 들어 그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사죄를 하는 순간 끝입니다.”

한국에 대한 일본 극우들의 생각이 어떤지, 위안부 문제가 왜 이토록 풀리지 않는지, 《주전장》엔 이를 엿보게 하는 일본 극우 민족주의자와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위험한 역사의식이 인터뷰로 터져 나온다. 극우 세력들의 목소리만 있는 건 아니다. 한·미·일 30여 명의 핵심 인물들의 목소리를 정반합 구조로 담아 오류를 바로잡고 진실에 한발 더 다가선다.

기존 본군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가 피해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과 달리, 다양한 의견들을 취합해 사건의 본질에 접근한 것이 《주전장》의 쾌거다. 아베 총리 배후에 있는, 일본 최대의 극우단체 ‘일본회의’ 수뇌부들의 인터뷰를 이례적으로 담아낸 것 역시 《주전장》을 새롭게 한다.

이 모든 취재가 가능했던 것은, 그리고 자칫 감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극의 중심추 역할을 한 것은, 일본계 미국인인 감독 미키 데자키다. 그는 자신의 뿌리라고 해서 일본에 치우치지도, 그렇다고 한국을 대변하지도 않는 제3자 입장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다. 인터뷰에 응한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완성된 영화를 확인한 후 ‘속았다’며 자국 내 상영금지 소송을 제기했다는데, 아베 신조 총리까지 발끈하면서 《주전장》은 더욱 유명해졌다. 아이러니다.

한편 미키 데자키 감독은 《주전장》 기자간담회에서 “일본 사람들이 일본 관료를 뽑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다르다”며 “일본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갖더라도 정책이지 사람에 대한 것은 아니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보이콧 재팬’이 다소 감정적으로 치우치고 있는 지금, 서울 중구청의 ‘No 재팬’ 깃발 게시 촌극이 벌어진 지금, 눈여겨볼 만한 지점이다.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 (주)쇼박스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 (주)쇼박스

《봉오동 전투》의 뜨거움, 양날의 검

‘일본군을 죽음의 골짜기로 유인하라!’ 8월7일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처음 승리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다룬다. 제작비는 무려 190억원. ‘개봉은 타이밍’이란 말이 있는데, 한국 내 일본 제품 불매운동 등과 맞물려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영화는 내내 뜨겁다. 일본 군인들이 조선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대하는 모습이 수위 높게 그려지고, 태극기가 중요한 순간 등장해 애국심을 자극한다. 작품적으로 양날의 검이다.

악독하고도 평면적으로 그려진 일본인 캐릭터와 세밀하지 못한 플롯은 아쉬운 지점. 그러나 이 영화엔 관객을 울컥하게 하는 몇몇 장면이 있다. 독립군들이 봉오동에 모습을 드러내는 하이라이트 전쟁 장면이 그렇고, 영화 막판 등장하는 깜짝 카메오가 그렇다. 《봉오동 전투》에 영화계 안팎의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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