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사회] 이 청년들이 ‘같은 청년’인가
  • 임명묵(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4학년)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9.24 10:00
  • 호수 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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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90년대생이 본 ‘세습사회 대한민국’

2007년 《88만원 세대》가 출간된 이후 세대론은 한국에서 끊임없는 의제로 논의됐다. 고도성장기에 기득권을 확립한 기성세대가 새로이 진출할 청년세대의 앞날을 가로막는다는 이야기였다. 곧이어 세대론은 ‘청년 담론’과 ‘586론’으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즉 무능력한 꼰대에, 고도성장기 사회에서 꿀만 빨아온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세대인 586이 그저 세상에 던져졌을 뿐인 청년들을 계속 착취하고 수탈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2007년에 본격화된 이런 논의는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인 2013년에도 이어졌고, 해를 거듭하며 더 거세졌다. 예컨대 ‘청년이 정치의 주역으로 떠올라야 한다’ ‘청년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 등의 이야기 말이다. 특히 청년들이 힘겨운 산업현장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이런 식으로 20대와 30대 청년들을 위로하는 수많은 칼럼이나 기고문이 쏟아졌다. 물론 가시적인 변화가 따라오지는 않았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문제의 진단부터 잘못되었는데 해결이 잘될 리가 만무했다.

8월31일 청년 노동자 단체 ‘청년 전태일’이 ‘조국 후보 자녀와 나의 출발선은 같은가?’를 주제로 연 공개간담회에서 한 참가자가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8월31일 청년 노동자 단체 ‘청년 전태일’이 ‘조국 후보 자녀와 나의 출발선은 같은가?’를 주제로 연 공개간담회에서 한 참가자가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대 청년론’이라는 틀린 진단

나는 약 4년 전 개인적 경험을 통해 이런 식의 ‘20대 청년론’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게 됐다. 당시 서울대에 입학해 2학년까지 마쳤던 나는 휴학한 후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때 잠시 천안시 구시가지의 한 PC방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그간 나름 ‘범생이’로 살아왔고, 새벽 PC방은 손님으로만 갔던 내게 당시의 경험은 꽤나 색다르게 다가왔다.

작은 동네의 야간 PC방에 있다 보면 매일 보던 사람들을 똑같이 볼 수 있다. 대체로 시키는 메뉴까지 늘 같다. ‘조지아 커피에 신라면 하나’ 이런 식이다. 내 또래의 많은 20대 청년들이 그렇게 PC방에 와 새벽밤을 매일 지새우고 갔고, 아르바이트생인 나와는 얼굴도 서로 익히고 가끔 짧은 대화도 주고받곤 했다. 사실 이런 종류의 PC방 죽돌이, 죽순이들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애초에 대한민국 PC방 문화가 태동할 때부터 생겨난 인간 군상이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구태여 하는 이유는 이때 청년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벽을 느꼈기 때문이다.

PC방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쉬는 날, 서울에 가서 종종 대학 친구들을 만나거나 그들의 소식을 듣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서울대에 다닐 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이질감을 느꼈다. 어제까지 보고 온 친구들은 하루하루 돈 벌며 PC방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고, 미래에 대한 계획은 없었으며, 그들의 삶에서 부모의 긍정적 영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 만나는 친구들은 서로가 힘들다고 말은 하지만 미래에 대한 번듯한 계획도 있고, 사회 이슈에 대해 각자 생각을 갖고 토론할 줄 알며, 인턴이나 어학연수 등으로 각종 경험을 쌓고 부모가 제공하는 유무형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PC방 죽돌이’와 ‘엘리트 서울대생’이라는 양극단으로 나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양극단은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 무엇 하나 공유할 수 없는, 서로 다른 경험을 쌓았다. 그들의 미래는 당연히 겹칠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사이에 있는 청년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이런 식의 상하층으로 분류될 수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수많은 ‘청년 담론’은 대체로 이런 차이를 무시하곤 했다. ‘청년 담론’에서 로스쿨을 나와도 막막하다는 이들과 고깃집에서 불판을 닦는 이들은 똑같이 ‘요즘 살기 팍팍해진 청년들’로 묶인다. 진단부터 틀렸으니 대안이 이상하고, 자연스레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온라인에서 자생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수저론’은 본질을 훨씬 잘 짚어낸 분석이었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물려주는 수저가 어떤 재료로 이뤄져 있냐는 것이지 나이가 몇 살이냐가 아니었다. 평소 사람들이 느끼던 직관과 너무나 잘 부합하는 구도였기에 수저론은 폭풍 같은 기세로 대중의 정서를 사로잡았고 공식적인 논의의 장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이미 이런 정서와 불만이 조성되어 있었기에 ‘조국 사태’가 던진 파문이 이렇게까지 커질 수 있던 것 아닐까 싶다. 부유층이 자녀에게 따뜻한 아랫목에만 있게 해 주는 것을 그 전이라고 누가 몰랐겠는가? 하지만 그게 이런 치밀하고 세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처음 알게 된 사람은 아주 많을 것이다. 즉 말만 무성했던 수저 계급이 어떤 식으로 대물림되는지, 마치 구름이 걷히자 태양이 나오는 것처럼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다. 각각 입시와 불평등을 건드려 대흥행을 한 《SKY캐슬》이나 《기생충》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리얼리티쇼의 재미까지 더해서 말이다.

결국 이번 조국 사태는 사람들이 다들 어렴풋이, 아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던 것을 그저 확인해 준 사건이었다. 조국 장관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그러는 자유한국당은?” 이렇게 반문하지만 사실 소용없는 이야기다. 나와 함께 새벽 PC방을 지키던 친구들에게 묻는다면 “나경원이 조국보다 나쁘구나”가 아니라 “다 똑같은 놈들이네요”라고 대답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가 상대방 자녀의 논문을 가지고 공격하는 것부터가 촌극이다. 그런 일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청년이 태반인데 말이다.

 

정치권의 촌극, 그리고 남겨진 이들

씁쓸한 것은 이들을 대표해 주겠다는 정치인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장 이 정부부터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겠다고 야심 차게 출범했지만 결과는 어떤가? 소득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으며, ‘개혁적’이라는 정권의 핵심 인사는 계층 대물림을 가장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던 게 드러났다. 집권 초 논의라도 됐던 불평등 문제는 어느새 대일 관계나 검찰 개혁 등에 밀려 의제에서도 사라진 것 같다. 아마 현 정부는 이제 강력한 사회적 프로그램을 추진할 의사도, 비전도, 역량도 없을 것이다.

이번 정권의 의의는 불평등 해결을 들고 왔지만 역설적으로 계층 문제를 사람들에게 정말 제대로 인식시켰다는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해결은 오히려 다음 정권을 기약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한국이 이미 계층사회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그 문제의식 위에서 이전과는 차별화되는 정책적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세력, 그리고 타인을 도덕적으로 훈계하기보다는 먼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성찰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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