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사라진 연천 고랑포구, 역사공원으로 살아나다
  •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0.03 17: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한국전쟁 전 경기 ‘최대 무역항’…잊힌 역사 알리려 ‘무모한 도전’ 중인 연천

경기도 연천군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 관광지라고 한다면 아마도 전곡리의 구석기 유적지를 떠올릴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어렸을 적 국사 공부를 하며 구석기 유적지의 대표격으로 ‘연천 전곡리 유적’을 달달 외웠던 기억들이 있을 테다. 아니나 다를까, 연천군으로 들어서자 원시인과 선사시대 동물 모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아치 구조물이 도로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런 연천군의 ‘구석기 마케팅’은 구석기 축제와 전곡선사박물관으로 그 맥이 이어진다.

선사 유적지는 연천의 중요한 자산임이 틀림없다. 다만 구석기 이야기만 하기에는 다양한 자원을 가진 지역이기에,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 지역 일대를 흐르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두 강이 연천군에서 만난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파주시가 임진강 생태 탐방로를 개방하고, 철원군에서 한탄강 래프팅, 한탄강 얼음 트래킹이란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동안, 연천군은 천혜의 두 강을 모두 끼고 있다는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지난 6월, 연천군 임진강 일대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에 등재되면서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되고 있었다.

연천군 장남면 일대의 임진강 풍경. 과거 '고랑포구'라는 경기북부 최대의 무역항이 발전했던 지역이다. ⓒ김지나
연천군 장남면 일대의 임진강 풍경. 과거 '고랑포구'라는 경기북부 최대의 무역항이 발전했던 지역이다. ⓒ김지나

전쟁 후 사라진 고랑포구, 역사공원으로 살아나

임진강은 한국전쟁 전까지 연천군이 경기 북부 최대의 무역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연천군 장남면의 ‘고랑포구’ 이야기다. 이곳이 그렇게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지점까지 임진강을 따라 밀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거운 화물을 싣고 배들이 내륙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5만여 명의 사람들이 살았고 화신백화점의 분점이 있을 정도로 큰 시가지를 이루고 있었다던 고랑포구는 한국전쟁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옛 고랑포구가 있었던 임진강변은 군부대 관할로, 지금은 일반인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대신 지난 5월 ‘고랑포구 역사공원’이 개관하면서 이곳의 역사도 재조명되기 시작하는 듯하다. 요즘의 전시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함인지,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 기술을 활용해서 지역의 사라진 옛 모습을 체험할 수 있게 한 콘텐츠들이 많았다. 어린아이를 둔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이 많은 것을 보니 그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고 볼만 했다.

전시관 한 켠에는 먼 미래에, 그리고 아마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르는, 번성한 도시로서 고랑포의 풍경이 영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물론 옹색한 유물 전시와 지루한 설명 일색인 것보다, 지역 주민 어린이들에게 볼거리 즐길 거리를 주고 화려한 미래를 꿈꾸게 하는 것이 더 고무적인 방향임에 틀림없다. 다만 그 옛날 고랑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이야기가 얽혀 있는지에 대해 조금 깊이 있는 고민과 설명이 뒷받침됐다면, 좀 더 진정성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고랑포구 역사공원 앞에 세워진 군마 '레클리스'의 동상 ⓒ김지나
고랑포구 역사공원 앞에 세워진 군마 '레클리스'의 동상 ⓒ김지나

‘레클리스’ 정신 따라 마을 발전시키는 연천 주민

고랑포구 역사공원의 정문 앞 광장에는 거대한 말 동상이 서 있었다.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레클리스(Reckless, 무모한)’란 이름의 군마다. 레클리스는 본래 ‘아침해’라고 불렸던 경주마였는데, 1952년부터 미국 해병대에서 군마로 활약했다고 한다. 특히 연천군에서 벌어졌던 네바다(Nevada) 전초 전투에서는 매일 50여 차례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탄약을 실어 날랐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레클리스는 미국에서 각종 훈장을 받고 하사관으로 진급하는 등, 동물로서는 유례가 없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그 뿐 아니라 그의 활약을 기념하는 동상이 미 해병대 박물관과 켄터키 말 공원에 세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고랑포구 역사공원에 레클리스의 세 번째 동상이 세워지면서, 전후 해병대와 함께 미국으로 떠난 지 65년 만에 고향 땅에도 비로소 그를 기리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연천 주민들이 만든 레클리스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마을카페 ⓒ김지나
연천 주민들이 만든 레클리스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마을카페 ⓒ김지나

어찌 보면 고랑포구의 역사와는 상관없는 스토리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랑포구 역사공원이 단지 잊힌 한 포구를 재현하는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연천군의 여러 역사 문화자원들을 재조명하기 위한 첫 단추라고 본다면 어떨까. 그 과정에는 레클리스의 이야기처럼, 연천군이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활약했던 지역으로서 한국인보다 미국인들에게 더 주목받아왔던 시선의 방향을 돌리는 일도 포함될 수 있을 테다.

이곳 주민들은 ‘레클리스’의 이름을 따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 이름처럼 무모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연천을 살기 좋은 삶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계속해 나가고 싶다고 하셨다. 레클리스 협동조합은 마을에 카페를 낸 것에 이어 고랑포구 역사공원 내에 두 번째 점포를 열었다. 연천 주민들의 무모한 도전 끝에는 잊히고 소홀했던 지역의 많은 자원이 다시 꽃피어 있는 미래가 펼쳐져 있길 응원해 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