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간적이고 파괴적인 조커의 탄생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0.05 14:00
  • 호수 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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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 혼돈 그 자체인 한 사내의 내면 탐구
애초에 조커가 있었다. 기괴한 광대 분장, 파괴적인 행동. 혼돈 그 자체의 상황인 고담시에 홀연히 나타난 그는 DC 코믹스 최고의 악당이자, 배트맨의 영원한 숙적으로도 유명한 캐릭터다. 동시에 기원을 알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원작 코믹스가 장대하게 명명한 영웅들의 탄생과는 달리, 조커의 탄생과 기원은 다양하게 변주되며 새로운 해석들을 불러들였다. 어디에서부터 어떤 이유로 나타났는지 알 수 없기에 더 두려운 존재.

토드 필립스 감독과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조커》를 통해 혼돈 그 자체인 한 사내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한때는 웃음이 전부였던 광대 아서 플렉스는 어떻게 조커가 되었는가.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손에 쥔 이 영화는 지금껏 등장한 무수한 코믹스 원작 영화와 확연히 다르다. 조커라는 불가해한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했던 것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조커》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조커》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예의와 배려 없는 세상이 만든 안티 히어로

매장이나 아동병원 등에서 광대로 일하는 아서 플렉스(호아킨 피닉스)는 코미디언을 꿈꾼다. 하지만 망상과 분열증으로 고통받는 그의 코미디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반사회적 성격을 지닌 자, 가난한 자인 아서의 삶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하루하루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멸시와 폭력으로 가득하다. 저녁 시간, 유명 코미디언이자 진행자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의 TV쇼를 보는 게 그의 유일한 낙이다.

조커가 가난한 코미디언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설정은 1988년 나온 코믹스 《킬링 조크》에 등장한다. 이는 잭 니콜슨이 조커를 연기한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1989)에도 영향을 미쳤고, 토드 필립스가 연출한 이번 영화에도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커의 모습에서 시간을 뒤로 돌려가며 질문을 던진다. 조커일 때 왜 광대 분장을 하고 있는 걸까. 그 기원에는 아서를 ‘해피’라고 부르는 그의 어머니가 있다. 아서는 세상에 늘 기쁨과 웃음을 전해 주라는 어머니의 말을 따른다. 즉 이 영화의 조커는 카드패의 해결사가 아닌, 농담(joke)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크다.

외톨이이던 아서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경악에 가까운 언론의 반응을 즐기기 시작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이 자신을 주목한다고 착각한 것이다. 여기에 아서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이 결합한다. 고담시의 심각한 빈부 격차, 특히 가난한 자들에 공감하지 못하는 부자들의 언행은 대중의 분노를 들끓게 만들었다. 각 기관의 파업으로 거리에는 이미 쓰레기가 넘쳐난다. 처음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아서는 세상이 원하는 질서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맞추려 노력한다. 통하지도 않을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 없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결국 그 역시 예의를 포기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조커 비긴즈’인가. 어느 정도는 그렇다. 다만 《조커》의 아서에게는 분명한 목적성이 없다. 혼란스러운 세상이 그를 안티 히어로로 만들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아서는 촉매제가 된다. 사람들이 부자를 처단한 이 ‘마스크 광대’에게 열광하기 시작하며 자발적으로 자경단과 시위대를 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련의 상황 끝에 머레이 쇼에 출연한 아서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머레이가 부자를 향한 범죄를 정당화하고 대중에게 동조한 책임을 묻자, 그는 조롱하듯 이렇게 되묻는다.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 아서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코미디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한 사람이, 부자들을 공격하고 사회 변혁을 꿈꾸는 반(反)영웅이 되는 역설. 《조커》는 그 역설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조커》는 스타일 면에서도 여타 코믹스 원작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취했다. 이 영화는 물리적 법칙을 가뿐히 무너뜨리기 위해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점철된 작품들의 대척점에 선다. 감독은 시대 배경을 아예 1980년대로 바꿔버렸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향을 숨기지 않는 작품이기도 하다. 《택시 드라이버》(1976), 《코미디의 왕》(1983)은 영화의 주제의식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특히 로버트 드 니로의 출연은 《코미디의 왕》(1983)을 향한 노골적인 오마주로 보이는 면이 있다. DC 유니버스에서 과감하게 떨어져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 시도가, 결과적으로 DC에 영광을 안겨준 셈이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연기

《조커》가 한층 무시무시한 영화로 완성될 수 있었던 8할의 이유는 호아킨 피닉스다. 하루에 사과 한 알로 버티며 만든 앙상한 몸으로, 그는 세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세상에 침투하는 사람을 완벽하게 연기해 낸다. 아서 플렉의 심리 드라마라고 불러도 좋을 이 영화에서 피닉스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블루 스크린 앞에서 연기가 망설여져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 주인공을 고사한 이 배우의 선택은 옳았다. 전형적인 히어로 무비의 문법에 녹아들기에 피닉스가 지닌 에너지는 너무 강렬하다.

그의 연기는 시저 로메로(TV 시리즈 《배트맨》(1966)), 잭 니콜슨, 히스 레저(《다크 나이트》(2008)), 자레드 레토(《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등 수많은 배우들이 거쳐간 조커의 얼굴을 단숨에 지워버릴 정도로 적절하다. 처음부터 광기의 악당이 아닌, 알약에 힘겹게 의존하며 참혹한 세상의 규칙에 꾸역꾸역 자신을 맞추려던 부적응자로 등장한 그는 120여 분 동안 아서의 변화를 매혹적으로 그린다. 그리고 기어이, 삶의 무게가 매달린 발을 질질 끌며 살아가야 했던 외톨이의 폭주를 납득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야 만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조커를 만났다. 다만 피닉스 버전의 조커를 다시 만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현재 DC는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 제작을 발표한 상태. 토드 필립스 감독에 의하면 피닉스 버전의 조커가 새로운 시리즈에 합류할 계획은 없다. 대신 “더 다양한 버전의 조커가 필요하다”는 것이 감독의 입장이다.

 

미국에 너무 위험한 조커?

영화가 너무 생생해도 문제다. 미국은 현재 《조커》 개봉으로 긴장감에 휩싸였다. 2012년 《다크 나이트》 상영 당시 콜로라도주 오로라의 한 극장에서 무차별 총기 난사가 일어난 전적 때문이다. 12명이 사망하고 70명이 부상한 이 사건은 미국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FBI와 미군은 《조커》 개봉에 경계 태세를 갖췄다. FBI는 범죄를 우상화하는 소셜 미디어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미군은 군인들에게 상영관 내 폭력 상황 발생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고 구체적 행동 지시를 내렸다. 극장 체인 랜드마크(Landmark Theatres)는 《조커》 상영 시 마스크와 장난감 무기 등을 소지한 관객 입장 금지 계획을 발표했다. 앞서 오로라 총기 사건 유가족은 《조커》의 배급사인 워너 브러더스 측에 개봉에 대한 유감을 표했다. 워너는 즉각 “총기 사건은 우리 사회의 중대한 문제”라면서 “가상의 인물 조커와 이 영화가 실제 세계의 폭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며, 영화 관계자들은 캐릭터를 영웅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님”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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